서천석 소아정신과 전문의·행복한아이연구소장
서천석의 행복 비타민 /
일전에 어느 출판인과 이야기하던 중 재테크 서적은 실용 서적이 아니라 어른용 판타지 장르라는 말을 듣고 함께 웃은 적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자신도 책에 나온 대로 실천해서 큰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이 솟구치지만, 책을 덮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현실은 다시 이전과 마찬가지의 잿빛으로 반복된다.
육아 서적들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다 보면 아이는 부모하기 나름이란 기대를 갖게 된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웠다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보면서 나라고 못 하겠냐는 자신감도 생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 모두 내면에는 전지전능함에 대한 환상이 깊숙이 숨어 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루어지리라는 환상이다. 생후 두돌이 지나기 전의 아이들은 이 환상을 실제라고 생각한다. 아기들이 볼 때 엄마는 엄마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대로 따라줘야 한다.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요구가 좌절되면 이유를 따지기 전에 바로 울어버린다. 아직은 좌절된 욕구를 자기 내부에서 다스릴 힘이 없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질서와 다른 사람들의 뜻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환상은 깨지지만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기회가 있으면 튀어나온다. 인격적인 성숙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애인이나 부부 사이와 같은 가까운 관계가 맺어졌을 때 환상은 다시 재림한다. 상대의 입장보다 자신의 욕구가 일방적으로 채워지기를 기대하며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장 이기적인 관계가 된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라며,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아이는 쉽게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이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이며, 나의 일부가 아닌 아이 그 자체인 것을.
우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이를 바꿀 수 있는 정도는 제한적이다. 결심은 장대할지 모르나 부모가 바쁜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기만 하다. 이런 현실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자는 것은 아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은 작은 짐만 덜어서 들어줘도 훨씬 발걸음이 가벼운 법이다. 세상과 부딪쳐 힘들게 살아갈 아이를 자신의 능력과 여건 속에서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노력이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이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최선이며 억겁의 인연으로 만난 아이에게 아무 대가 없이 주는 선물이다. 너무 큰 꿈은 오히려 나를 괴롭히고 아이를 괴롭힌다. 내가 지금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노력하고 있다면 자신을 격려하자. 그래, 나는 오늘 우리 아이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있다고.
서천석 소아정신과 전문의·행복한아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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