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서울 구경’ 한번 못해 본 시골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 차원의 ‘수학여행’이 그 어느 때 이야기인가. 해외여행이 다반사인 이 시대에 수학여행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난 모르겠다. 병아리떼 몰고 다니듯 수백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한 곳에 몰아 넣고, 먹이고, 재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른다. 그런 행사를 전국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매년 치러낸다. 그래서 난, 나도 선생이지만 선생님들이 존경스럽다.
“모두 모아 놓고 방 불 끄고 촛불을 켜 들게 하는 거야. 그리고 한 사람씩 지나온 일 중 한 가지씩을 반성하게 하는 거야. 심성 프로그램 중 하난데 해보면 정말 좋아. 재미있기도 하고.” 아이들을 위한다는 건 사실 핑계고 그런 거라도 해야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 딴 짓 못할 것 같아 동료 선생이 알려 준 대로 양초 하나씩을 준비케 한다. 그러나 준비해 오는 아이가 이상한 아이일 터. 반 전체가 쓰고도 남을 팔뚝만한 양초 하나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방 깊숙이 집어 넣는다. 그리고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수학여행이여!’
밤에는 팔공산을 배경으로 사쿠라와 난초를 캐고, 고도리를 잡느라 선생들과 숨바꼭질. 낮에는 간밤에 못 잔 잠 보충하느라 유적지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우리 아이들이다. 그런데 꽃 같은 여고생들이 같은 숙소에 투숙했다고 하니 오히려 방에서 얌전히 카드나 화투치는 아이가 고마울 정도.
그렇게 하루, 이틀을 보내고 맞이한 마지막 밤. 회장에게 전원 집합을 지시한다. “야들아, 이게 뭔 줄 알어?” 아이들의 시선이 손에 들린 신문지 뭉치로 단박에 쏠린다. “짜안!” “에이, 난 또 술인 줄 알았네.” “?” 담임이 자신들을 위해 특별히 양주를 준비한 줄로 아는 녀석들. 한 술 더 떠서, “중학교 때 다 해 봤어요. 반성하고 칭찬하는 거….”
김 팍 샌다. 담임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미처 펼쳐 보이기도 전에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모션까지 취하는 놈도 있다. “야, 야. 그래도 가져온 성의를 봐서 잠깐만 앉아 봐. 시간 많이 안 끌게. 회장, 방 불 꺼.” 양초 심지에 불이 붙으니 방안이 환해지면서 분위기가 반전되는 느낌이다. “이런 거 해본 아이가 있다고 하니 그럼 안 해 본 아이부터 해 볼까?” “그러지 말고 선생님부터 하세요.” “나부텀?” “네에!” “좋아. 그럼 나부터 하지. 그럼 너희들도 꼭 하는 거다. 알았지?” “네에!” “좋아. 그럼 선생님부터….”
갑자기 주위가 바뀐 탓인가. 아니면 너무도 낯선 정적 때문이어서인가. 사뭇 긴장이 된다. “좋아. 으흠, 우선 반성부터 할게. 사실은 어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선생님이 주욱 모시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머님이 무척 편찮으셨어. 그런데 그 편찮으신 어머니한테 선생님이 가끔… 화를….” “?” “!” “….”
예상치, 정말 예상치 못했다. 얘들아, 그대들은 한 선생이 그 순간 전혀 뜻밖의 체험을 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오. 그대들 때문에, 그대들의 수학 여행 때문에, 한 울보 선생이 평생 잊지 못할 참회를 하게 되었다는 것, 이 자리를 빌어서 그대들, 아니, 그대들의 수학여행에 정말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전성호/서울 휘문고 교사 ohyeahh@hanmail.net
전성호/서울 휘문고 교사 ohyeah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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