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호/서울 휘문고 교사
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젊은 중과 늙은 중이 절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 여인이 개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개울물이 넘친 탓. 젊은 중이 다가가 등을 디민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여인이 젊은 중 등에 업힌다. 개울을 건넌 뒤 여인은 제 갈 길을 가고 두 중은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절이 가까워졌을 때쯤 늙은 중이 말을 꺼낸다.
“계율을 어겼으니 절에 도착하자마자 너는 벌을 받을 것이다!” 젊은 중이 대답한다. “저는 여인을 내려놓고 왔는데 스님은 아직까지 그 여인을 머리 속에 담고 계십니까?”
아름다운 얘기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다. 전날 흠씬 두들겨 맞고도 다음날이면 언제 맞았냐는 듯 또 떠들어대는 우리 아이들. 그들이야말로 여인을 깡그리 잊은 젊은 중이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으로 젊은 중을 바라보던 늙은 중은 사사건건 야단치고 싶어 안달하는 바로 선생인 내 모습 아니고 그 누구이겠는가.
어른들은 어린아들이 서로 좋아하는 꼴을 못 본다. 왜? 공부를 안 해서? 아니, 이몽룡이는 춘향이와 그렇게 잘 놀고도 전국 수석을 하질 않았는가. 그렇다면 혹시, 그건 자신들은 젊은 시절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컸는데 지금 아이들은 인생을 즐기는 것(?) 같아 배 아파 그런 건 아닐까? 자연스런 인체의 생리현상, 끓어 오르는 젊음이 마치 뭐 잘못된 것이기라도 하듯 억누르려만 한다. 그래서 인생의 황금기인 청소년기가 일생에서 가장 빨리 벗어나고픈 암흑기로 변해 버리고 마는 거다.
어른들이 애들을 보는 시선엔 이중 잣대가 숨어 있다. 축제 때 기괴한 복장에 현란한 춤을 추는 아이 보고 멋지다고 할 때는 또 언제고, 교복 밑에 와이셔츠만 삐져 나와도 복장이 그게 뭐냐고 야단이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하고 싶은 일 다 해 보랄 때는 또 언제고, 입시 사정표를 좌에서 우로 주욱 훑으며 “이 점수 가지고는 여기밖에 갈 데가 없어, 알아들어?” 하는 건 또 뭔가. ‘Carpediem(현재를 즐겨라)’을 좌우명으로까지 삼았던 선생이 “담배? 술? 그거 대학 들어가면 누가 뭐라 그럴 사람 한 사람도 없어. 연애? 그것도 대학 가서 실컷 해.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공부야, 알아 들어?” 라고 말하는 건 또 뭔가.
청소년기의 주인공은 결코 기성세대나 선생이 아니다. 청소년들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운 시기를 아름답게 만들 권리를 허용하는 관용이 너무도 너무도 아쉬운 때다.
전성호/서울 휘문고 교사 ohyeah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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