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건축가 김기헌씨가 지난달 28일 경기도 가평 용추계곡 물안골 안에 짓고 있는 영국식 흙집 코브하우스 앞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느림과 자유] 생태건축가 김기헌씨
생태학교와 살림집 8동 짓기 5년째
나무 짜맞춘 한옥집에 지붕창 내고
영국식 흙집은 일일이 손으로 쌓아
“자연과 공존하는 자유 배우는 과정” 김기헌(53)씨는 경기도 가평군 용추계곡의 가장 안쪽인 물안골에서 자신이 번 돈을 다 쏟아부어 5년째 집을 짓고 있다. 자신의 홈페이지(www.dasrm.org)에 내건 글귀처럼 ‘내 맘대로 짓는 집’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짓는 여덟 채의 집은 용추계곡의 다른 집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의 집들은 흙과 나무가 주 재료인 생태주택이다. 용추계곡 곳곳에 들어선 알록달록 예쁜 팬션과 달리 그가 지은 집은 무심히 쳐다보면 자연과 분간이 잘 안 될 정도로 주변 경관과 어울린다. 지난달 28일 오후1시. 높은 봉우리 사이에 자리한 물안골이지만 집터는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볕이 잘 든다. “한겨울에도 해만 뜨면 봄날처럼 따뜻한 곳”이라며 “남쪽지방에서 자라는 감나무도 있다”고 자랑했다. 화전민이 살던 곳이라는 게 이해가 됐다. 초입에 있는 집 두채는 육각형 모양의 한옥이다. 살림집과 교육장으로 쓰일 집으로 전통 짜맞추기 방식을 쓰면서도 창문을 크게 내고 빛이 들어오도록 천장에도 유리창을 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다. 김씨는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들어온 뒤 100년 가량 전통 한옥은 사찰이나 문화재 등에만 쓰여 실용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며 “전통 기법의 현대적인 실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천장을 부채살 형태로 나무를 끼워맞춰 기둥이 없이 지붕을 떠받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런 실험의 하나다.
한옥 뒤편에는 영국식 흙집인 코브하우스 네 채와 나무토막과 흙을 함께 쌓은 토막나무집(위 사진), 그리고 돌벽집이 한 채씩 들어서고 있다. 그는 영국식 흙집인 코브하우스에 마음이 많이 간다고 했다. 네 채를 지은 이유다. 코브하우스는 흙벽을 쌓는 데 품과 힘이 아주 많이 든다. 도자기를 만들 때처럼 흙을 손으로 반죽해 1~3일 동안 숙성시킨 뒤 자르지 않은 짚을 25%가량 넣어 반죽한 뒤 다시 하루 가량 숙성시킨다. 그렇게 숙성시킨 흙을 긴 짚과 함께 손으로 반죽하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반죽한 흙을 일일이 손으로 쌓아 올린다. 김씨는 “집의 벽 전체가 벽돌 한 장이라고 보면 된다”며 “망치로 치면 어떤 때는 불꽃이 튈 정도로 단단하다”고 했다.
흙을 써서 집을 지으면서 실험도 많이 했다. 지금도 물안골에는 그가 실험용으로 만든 ‘흙절편’이 곳곳에 쌓여 있다. 1년 동안 비에 노출시켜 마모량을 재고 여러 종류의 기름과 나무 삶은 물 등으로 써서 실험을 했다. 흙에 숯을 비롯한 여러가지 첨가물을 넣기도 했다. 그런 노력끝에 그는 손으로 문질러도 묻어나지 않는 흙벽을 개발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김씨가 자신의 생태건축 철학에 따라 토목공사를 전혀 하지 않고 집을 지었다는 점이다. 그는 생태건축의 요체가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좇아가는 데 있다고 본다. 돌아보니 생태건축은 그에게 “자연을 억누르거나 자연에 억눌리는 게 아니라 공존의 자유를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실제 그는 집터를 만들기 위해 비탈을 깎거나 터파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돌벽집은 비탈을 그대로 살린 결과 방과 마루의 높이가 다르다. 또 명상용으로 동그랗게 설계한 코브 하우스 한 채는 그 옆의 큰 바위에 자리를 내주느라 타원형으로 찌그러졌다. 집 사이를 오가는 길도 내지 않았다. 큰 바위와 낙엽, 덩쿨이 한데 어울린 숲자체가 길이고 집과 집을 잇는 길이 바로 숲이다.
“어떤 사람들은 친환경이나 생태주의가 사람이 자연에 양보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자연과 사람이 서로 협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80%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 김씨의 집들은 내년이면 완성된다. 그는 이곳을 성인들을 위한 생태학교로 만들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생태학교는 많고, 어른들은 바뀌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생태적인 삶을 강요하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다. 김씨는 산과 인연이 깊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씨와 산과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신과 의사나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부모님이 반대하자 대학시험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반발했다. 하지만 친구의 권유로 “적이나 걸어 두자”는 생각에 진학한 동국대는 그에게 불교를 만나게 해준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유신 반대 시위로 제적됐고, 불교를 공부하면서 우리 역사를 알고 싶어 서강대에 진학했으나 ‘전력’이 드러나 다시 제적되는 등 네 차례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때마다 그는 산으로 갔다. 범어사 선원장이었던 화엄 스님의 유발 상좌로 2년 동안 토굴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0년 결혼하고 이듬해 이화여대 앞에서 찻집을 내 10년 이상 운영하면서도 틈만 나면 산을 찾아 정진했다. “언젠가는 산으로 가서 살겠다고 마음 먹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찻집을 운영하면서도 1년에 2~4개월은 주로 집 짓는 데를 찾아다니며 노동을 하고 건축기술을 배웠다. “노동을 하고 나면 목욕을 한 듯 몸이 개운했다”는 그는 도자기, 금속공예, 목공예 등도 배웠다. “집을 짓는다는 말은 건축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쓰이는 그릇, 식기, 주전자 등도 그 집에 맞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굳이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지으려 했을까. “내가 땀 흘려 지은 집에 대한 애착이 오랜 방랑성을 잠재워주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한다. 도시에서의 준비기간은 나눔의 시절이기도 했다. 그는 산과 도시에서 배운 생태주의와 건축기술을 늘 나누며 살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 참여했고, 녹색대학에서 생태건축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녹색연합이 펴내는 책 <작은것이아름답다>에 생태건축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생태건축 캠프도 열었다. 명상을 가르치고 독학으로 터득한 침술로 주위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는 내년이면 30여 년 전부터 꿈꾸던 산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동갑내기 아내 박은재씨도 머지 않아 물안골로 내려올 예정이다. 그는 의대와 한의대에 다니는 딸과 아들에게도 서울보다 시골에서 개업해 삶의 여유를 갖고 제대로 된 의술을 펴라고 권한다. “결혼하기 전에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이 처가에 들이닥쳐 장롱까지 뒤진 적도 있습니다. 그런 저와 결혼해주고 또 산에서의 삶을 준비하도록 허락해준 아내가 늘 고맙습니다.” 가평/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나무 짜맞춘 한옥집에 지붕창 내고
영국식 흙집은 일일이 손으로 쌓아
“자연과 공존하는 자유 배우는 과정” 김기헌(53)씨는 경기도 가평군 용추계곡의 가장 안쪽인 물안골에서 자신이 번 돈을 다 쏟아부어 5년째 집을 짓고 있다. 자신의 홈페이지(www.dasrm.org)에 내건 글귀처럼 ‘내 맘대로 짓는 집’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짓는 여덟 채의 집은 용추계곡의 다른 집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의 집들은 흙과 나무가 주 재료인 생태주택이다. 용추계곡 곳곳에 들어선 알록달록 예쁜 팬션과 달리 그가 지은 집은 무심히 쳐다보면 자연과 분간이 잘 안 될 정도로 주변 경관과 어울린다. 지난달 28일 오후1시. 높은 봉우리 사이에 자리한 물안골이지만 집터는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볕이 잘 든다. “한겨울에도 해만 뜨면 봄날처럼 따뜻한 곳”이라며 “남쪽지방에서 자라는 감나무도 있다”고 자랑했다. 화전민이 살던 곳이라는 게 이해가 됐다. 초입에 있는 집 두채는 육각형 모양의 한옥이다. 살림집과 교육장으로 쓰일 집으로 전통 짜맞추기 방식을 쓰면서도 창문을 크게 내고 빛이 들어오도록 천장에도 유리창을 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다. 김씨는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들어온 뒤 100년 가량 전통 한옥은 사찰이나 문화재 등에만 쓰여 실용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며 “전통 기법의 현대적인 실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천장을 부채살 형태로 나무를 끼워맞춰 기둥이 없이 지붕을 떠받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런 실험의 하나다.
나무토막과 흙을 함께 쌓은 토막나무집
“어떤 사람들은 친환경이나 생태주의가 사람이 자연에 양보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자연과 사람이 서로 협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80%의 공정을 보이고 있는 김씨의 집들은 내년이면 완성된다. 그는 이곳을 성인들을 위한 생태학교로 만들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한 생태학교는 많고, 어른들은 바뀌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생태적인 삶을 강요하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다. 김씨는 산과 인연이 깊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씨와 산과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신과 의사나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부모님이 반대하자 대학시험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반발했다. 하지만 친구의 권유로 “적이나 걸어 두자”는 생각에 진학한 동국대는 그에게 불교를 만나게 해준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대학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유신 반대 시위로 제적됐고, 불교를 공부하면서 우리 역사를 알고 싶어 서강대에 진학했으나 ‘전력’이 드러나 다시 제적되는 등 네 차례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때마다 그는 산으로 갔다. 범어사 선원장이었던 화엄 스님의 유발 상좌로 2년 동안 토굴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80년 결혼하고 이듬해 이화여대 앞에서 찻집을 내 10년 이상 운영하면서도 틈만 나면 산을 찾아 정진했다. “언젠가는 산으로 가서 살겠다고 마음 먹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찻집을 운영하면서도 1년에 2~4개월은 주로 집 짓는 데를 찾아다니며 노동을 하고 건축기술을 배웠다. “노동을 하고 나면 목욕을 한 듯 몸이 개운했다”는 그는 도자기, 금속공예, 목공예 등도 배웠다. “집을 짓는다는 말은 건축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쓰이는 그릇, 식기, 주전자 등도 그 집에 맞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굳이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지으려 했을까. “내가 땀 흘려 지은 집에 대한 애착이 오랜 방랑성을 잠재워주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한다. 도시에서의 준비기간은 나눔의 시절이기도 했다. 그는 산과 도시에서 배운 생태주의와 건축기술을 늘 나누며 살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 참여했고, 녹색대학에서 생태건축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녹색연합이 펴내는 책 <작은것이아름답다>에 생태건축에 관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생태건축 캠프도 열었다. 명상을 가르치고 독학으로 터득한 침술로 주위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는 내년이면 30여 년 전부터 꿈꾸던 산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동갑내기 아내 박은재씨도 머지 않아 물안골로 내려올 예정이다. 그는 의대와 한의대에 다니는 딸과 아들에게도 서울보다 시골에서 개업해 삶의 여유를 갖고 제대로 된 의술을 펴라고 권한다. “결혼하기 전에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이 처가에 들이닥쳐 장롱까지 뒤진 적도 있습니다. 그런 저와 결혼해주고 또 산에서의 삶을 준비하도록 허락해준 아내가 늘 고맙습니다.” 가평/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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