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종합잡지 ‘페이퍼’ 만드는 김원씨
[느림과 자유] 문화종합잡지 ‘페이퍼’ 만드는 김원씨
문화 트렌드는 기본…사람·일상 등 담아 ‘따뜻한 소통 12년’
콘텐츠 10~20% 독자들이 꾸미고 매년 이웃돕기 바자회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모두의 로망이다. 많은 이들이 “먹고 살자고” 마뜩하지 않은 일을 하며 산다. 심지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이들도 많다. 월간 <페이퍼>의 김원 대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그가 원했던 일은 “내 마음대로 한번 잡지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1995년 <페이퍼>를 창간한 이유다. ‘마음대로’ 만든다고 하지만 <페이퍼>는 개성이 뚜렷하다. 밝고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문화집단이 만드는 문화종합잡지가 스스로 규정한 정체성이다. 실제 11월호로 창간 12주년을 맞은 <페이퍼>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한 문화종합잡지다. 당연히 영화, 음악, 연극, 만화 등 ‘정통’ 문화 장르를 다룬다. 사람에 대한 관심의 폭은 넓다. 영화배우 조승우, 가수 거미, 김창렬, 재즈보컬 말로 등 잘나가는 예술가들 뿐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고 훌쩍 세계 여행을 떠난 여성이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녀 등 보통 사람도 등장한다. 대담이나 특집은 더욱 도드라진다. 잡지는 솔로, 외로움, 나쁜남자 못된여자 등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을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살펴본다. 냉장고를 문화적으로 들여다본 특집을 내기도 하고 그와 다른 기자들이 꿈꾸는 학교를 상정하고 교칙과 졸업시험지까지 만들어 실은 적도 있다. “지하철에서 잡지를 보다 낄낄거리는 사람은 우리 독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기존 잡지의 형식의 파괴가 형식처럼 보일 정도로 편집방향조차 없이 어수선해 보이지만 <페이퍼>를 관통하는 철학이 엄연히 있다. 다름아닌 소통. 콘텐츠의 10~20% 가량을 독자들이 직접 참여해 만들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페이퍼>에는 이 잡지 홈페이지(www.PAPERda.com)에서 활동하는 독자들의 카툰이 실린다. ‘페이퍼 패밀리의 클립보드’라는 코너는 독자들이 다른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 공연, 앨범. 책, 게임 등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담은 글로 꾸며진다. ‘그 집이 맛있다더라’에 소개되는 맛집도 독자들이 홈피에 추천한 집들이다. <페이퍼> 패밀리 사이의 소통은 책 밖에서도 이뤄진다. 편집진과 독자들은 1년에 한 차례씩 바자회를 열어 모은 돈으로 다달이 100만원이상씩을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 쓴다. 이런 소통의 결과 이 잡지의 홈페이지(www.paperda.com)에서 활동하는 회원만 3만명이 넘는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소통의 출발인만큼 <페이퍼>는 디자인에도 그런 철학을 담고 있다. 김 대표는 “읽기를 강요하는 편집 대신 편안하게 글과 만날 수 있도록 잔잔하게 디자인을 한다”고 했다. 12년 동안 지속된 그런 노력의 결과 <페이퍼>는 문화계에서는 이름난 잡지가 됐다. 발행부수에 대한 물음에 김 대표는 “월간지 가운데 선두 그룹일 것”이라고 했다. 편집장 포함 4명이 다달이 132쪽 분량의 책을 만드는 게 쉽지는 않을 터. 김 대표는 일인다역을 한다. 기자, 사진기자, 아트디렉터로 제작에 참여하고, 회사 대표이자 발행인으로 경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마감 때를 빼면 여유롭게 지낸다”고 했다. 김 대표가 잡지를 만들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행복해지고 싶어서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남들이 부러워하는 한 중앙일간지의 아트디렉터로 일했다. 꽤 많은 월급을 받았고, 생활은 안정됐지만 즐겁지 않았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일도 재미가 없었다. 몸과 마음을 쥐어짜내 쏟아낸 디자인은 잘 모르는 이들에 의해 쉽게 뒤집어졌다. 괴로웠다. 그 시절, 술이 약이었다. 그렇게 5년을 보낸 뒤 1989년 보름 동안 휴가를 얻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유럽이 주는 문화적 쇼크를 경험했습니다. 건축물은 물론이고 문고리 하나하나가 독특한 디자인 작품이더라구요. 남자 화장실 소변기도 비슷한 게 없었어요.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철물점, 빵집, 생선가게 주인들의 밝고 환한 얼굴에서는 삶의 여유가 묻어났다. “돈을 못버는 사람들도 삶과 예술을 즐기며 살았다.” 한국에 돌아와 1년 뒤 사표를 던지고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주위에서는 정신이 나갔다고 했다. 그렇게 입학한 미술대학에서는 또 다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천재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프랑스에 저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이미 있었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19살 쯤 된 청년들이 가진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작품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축적한 지식의 총합이더군요.” 맥이 빠졌다. 미술가로서의 성공 대신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1992년 돌아와서도 충격의 여진은 계속됐다. 프리랜서로, 월간지 아트디렉터로, 처남이 운영하는 의류회사의 디자인 실장으로 일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재미도 없었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아니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대학 졸업 뒤 가장 오래 한 일이 잡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 문화잡지를 만들어보자. 사업가인 처남이 돕겠다고 나섰다. <페이퍼>는 그렇게 탄생했다. 물론 시작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만부를 뿌렸다. 잡지를 차에 싣고 사흘간 서울을 돌며 주로 카페에 잡지를 쌓아뒀다. 수백통의 독자편지가 쏟아질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하지만 유일한 수익원인 광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6개월만에 폐간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듣은 카페 주인들이 구독료를 내겠다고 했고, 김창환, 최신실, 홍진경, 전유성씨 등 문화계 인사들도 수백 만원을 모아 보내왔다. 그 힘으로 다시 시작했지만 적자 행진은 계속됐다. 97년 아이엠에프 사태 때는 “정말 그만두려고 했다.” 종이값을 현찰로 갖고 가지 않으면 인쇄조차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서 유가지로의 전환을 권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소심하게“ 1천원에서 시작한 <페이퍼> 운영은 2006년 잡지값을 5천원으로 올린 뒤 안정이 됐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지난 날이 행복했다고 한다. 행복? 그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무도 <페이퍼>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들었다. “한 독자가 서점에서 우리 잡지를 사서 가슴에 안았을 때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다는 얘기를 전해왔어요.” 오래된 친구같은 잡지. 그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다.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콘텐츠 10~20% 독자들이 꾸미고 매년 이웃돕기 바자회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은 모두의 로망이다. 많은 이들이 “먹고 살자고” 마뜩하지 않은 일을 하며 산다. 심지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이들도 많다. 월간 <페이퍼>의 김원 대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그가 원했던 일은 “내 마음대로 한번 잡지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1995년 <페이퍼>를 창간한 이유다. ‘마음대로’ 만든다고 하지만 <페이퍼>는 개성이 뚜렷하다. 밝고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문화집단이 만드는 문화종합잡지가 스스로 규정한 정체성이다. 실제 11월호로 창간 12주년을 맞은 <페이퍼>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성공한 문화종합잡지다. 당연히 영화, 음악, 연극, 만화 등 ‘정통’ 문화 장르를 다룬다. 사람에 대한 관심의 폭은 넓다. 영화배우 조승우, 가수 거미, 김창렬, 재즈보컬 말로 등 잘나가는 예술가들 뿐 아니라 직장을 그만두고 훌쩍 세계 여행을 떠난 여성이나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녀 등 보통 사람도 등장한다. 대담이나 특집은 더욱 도드라진다. 잡지는 솔로, 외로움, 나쁜남자 못된여자 등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을 문화적 프리즘을 통해 살펴본다. 냉장고를 문화적으로 들여다본 특집을 내기도 하고 그와 다른 기자들이 꿈꾸는 학교를 상정하고 교칙과 졸업시험지까지 만들어 실은 적도 있다. “지하철에서 잡지를 보다 낄낄거리는 사람은 우리 독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기존 잡지의 형식의 파괴가 형식처럼 보일 정도로 편집방향조차 없이 어수선해 보이지만 <페이퍼>를 관통하는 철학이 엄연히 있다. 다름아닌 소통. 콘텐츠의 10~20% 가량을 독자들이 직접 참여해 만들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페이퍼>에는 이 잡지 홈페이지(www.PAPERda.com)에서 활동하는 독자들의 카툰이 실린다. ‘페이퍼 패밀리의 클립보드’라는 코너는 독자들이 다른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영화, 공연, 앨범. 책, 게임 등에 대한 소개와 감상을 담은 글로 꾸며진다. ‘그 집이 맛있다더라’에 소개되는 맛집도 독자들이 홈피에 추천한 집들이다. <페이퍼> 패밀리 사이의 소통은 책 밖에서도 이뤄진다. 편집진과 독자들은 1년에 한 차례씩 바자회를 열어 모은 돈으로 다달이 100만원이상씩을 소외된 이웃을 돕는데 쓴다. 이런 소통의 결과 이 잡지의 홈페이지(www.paperda.com)에서 활동하는 회원만 3만명이 넘는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소통의 출발인만큼 <페이퍼>는 디자인에도 그런 철학을 담고 있다. 김 대표는 “읽기를 강요하는 편집 대신 편안하게 글과 만날 수 있도록 잔잔하게 디자인을 한다”고 했다. 12년 동안 지속된 그런 노력의 결과 <페이퍼>는 문화계에서는 이름난 잡지가 됐다. 발행부수에 대한 물음에 김 대표는 “월간지 가운데 선두 그룹일 것”이라고 했다. 편집장 포함 4명이 다달이 132쪽 분량의 책을 만드는 게 쉽지는 않을 터. 김 대표는 일인다역을 한다. 기자, 사진기자, 아트디렉터로 제작에 참여하고, 회사 대표이자 발행인으로 경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마감 때를 빼면 여유롭게 지낸다”고 했다. 김 대표가 잡지를 만들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행복해지고 싶어서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남들이 부러워하는 한 중앙일간지의 아트디렉터로 일했다. 꽤 많은 월급을 받았고, 생활은 안정됐지만 즐겁지 않았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일도 재미가 없었다. 몸과 마음을 쥐어짜내 쏟아낸 디자인은 잘 모르는 이들에 의해 쉽게 뒤집어졌다. 괴로웠다. 그 시절, 술이 약이었다. 그렇게 5년을 보낸 뒤 1989년 보름 동안 휴가를 얻어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유럽이 주는 문화적 쇼크를 경험했습니다. 건축물은 물론이고 문고리 하나하나가 독특한 디자인 작품이더라구요. 남자 화장실 소변기도 비슷한 게 없었어요.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철물점, 빵집, 생선가게 주인들의 밝고 환한 얼굴에서는 삶의 여유가 묻어났다. “돈을 못버는 사람들도 삶과 예술을 즐기며 살았다.” 한국에 돌아와 1년 뒤 사표를 던지고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다. 주위에서는 정신이 나갔다고 했다. 그렇게 입학한 미술대학에서는 또 다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천재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프랑스에 저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이미 있었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19살 쯤 된 청년들이 가진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작품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축적한 지식의 총합이더군요.” 맥이 빠졌다. 미술가로서의 성공 대신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다. 1992년 돌아와서도 충격의 여진은 계속됐다. 프리랜서로, 월간지 아트디렉터로, 처남이 운영하는 의류회사의 디자인 실장으로 일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재미도 없었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아니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대학 졸업 뒤 가장 오래 한 일이 잡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 문화잡지를 만들어보자. 사업가인 처남이 돕겠다고 나섰다. <페이퍼>는 그렇게 탄생했다. 물론 시작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만부를 뿌렸다. 잡지를 차에 싣고 사흘간 서울을 돌며 주로 카페에 잡지를 쌓아뒀다. 수백통의 독자편지가 쏟아질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하지만 유일한 수익원인 광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6개월만에 폐간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듣은 카페 주인들이 구독료를 내겠다고 했고, 김창환, 최신실, 홍진경, 전유성씨 등 문화계 인사들도 수백 만원을 모아 보내왔다. 그 힘으로 다시 시작했지만 적자 행진은 계속됐다. 97년 아이엠에프 사태 때는 “정말 그만두려고 했다.” 종이값을 현찰로 갖고 가지 않으면 인쇄조차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서 유가지로의 전환을 권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소심하게“ 1천원에서 시작한 <페이퍼> 운영은 2006년 잡지값을 5천원으로 올린 뒤 안정이 됐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지난 날이 행복했다고 한다. 행복? 그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무도 <페이퍼>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들었다. “한 독자가 서점에서 우리 잡지를 사서 가슴에 안았을 때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다는 얘기를 전해왔어요.” 오래된 친구같은 잡지. 그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다.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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