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8일치 본지 1면과 3면에 실린 ‘외국인 고용 14년, 중소제조업 성장엔진 비상’ 기사
“싼 임금에 맛만 들여 이렇게 비틀어져”
아빠는 참 까맣다. 나는 참 하얗다. 아빠의 얼굴을 보며 난 그 피부색을 닮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나를 와락 끌어안기를 좋아하셨다. 그때마다 난 불쾌했다. 찌들 때로 찌든 땀 냄새와 실핏줄이 터진 그 벌건 눈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난 참 곱게 자랐다. 하얀 얼굴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공부도 열심히 했다. 서울대에 들어왔다. 예쁘게 컸다. 나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우리 집이 커지는 줄 알았다. 12평에서 18평, 24평으로 집이 커졌다. 근데 아빠 얼굴은 점점 까매지고, 눈은 빨개졌다.
‘중소기업 산업연수생 도입 후-인력난 불 껐지만 기술전수 맥 끊겼다’ 취재 후기를 쓰면서 난 왜 아빠 얘기를 꺼내는 걸까?
“너는 꼭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서 일해라”
취재하면서 나는 아빠를 참 자주 보게 됐다
오늘, 그들이 청춘을 바친 공장의 미래는 캄캄하다 인천 부평구 알루미늄 처리 공장에서 만난 김신곤(47)씨. 그는 20년간 알루미늄 밥을 먹었다. 제대 후 할 일을 찾던 그에게 알루미늄 공장은 알루미늄만큼이나 반짝이는 은빛 꿈을 심어줬다. 취직 후 10여년은 참 즐거웠다. 기술도 배우고 밑으로 후배들도 들어왔다. 알루미늄 처리와 관련해 새로운 기계들도 속속 들어왔다. 일은 힘들었지만 자신도, 공장도 크고 있다는 생각에 기운이 절로 났다. 그는 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한다. 일이 정말 힘들어져버린 때를. “언제부턴가 설비투자가 끊겼어. 작업환경? 나아지기는커녕 10년 전으로 후퇴한 거야. 임금이 물가상승만큼만 올라도 살 수 있을 텐데. 여기 일을 3D라고 부르기 시작한거야.” 공장 안에는 화학제품 냄새가 진동한다. 그 밑으로 외국인 노동자 10명과 아줌마 1명이 있다. 그는 “누가 와서 배우려 하겠어? 나까지만 하고 끝나는거야. 진짜 슬픈거지”라고 한숨을 쉰다. 김씨의 얼굴은 참 까맸고, 눈은 충혈돼 있다. 서울시 성수동의 한 염색 공장. 공장 터 700평 중 200평만 기계를 돌리고 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바깥이 공장 안보다 오히려 더 시원하다. 90년대 초만 해도 직원 120명이 넘던 이곳에선 지금 40명도 안되는 직원들이 일한다. 40대 아줌마들과 외국인 노동자, 백발의 60대 남성들도 보인다.
현장 책임을 맡고 있는 김아무개(45) 과장은 할 말이 많다. “외국인 애들 길어야 3년인데 데리고서 뭘 해. 사업이 발전하려면 후진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정말 최악의 상황이야.” 그는 정부정책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애초부터 산업연수생을 받지 말아야 했어. 그때 이후 작업 환경, 복지시설 이런 데는 관심 하나도 안 갖고 싼 임금수준에 맛만 들인 거야. 당시 한참 돈 많이 벌었을 때 후생 복리에 투자했다면, 이쪽 노동시장이 이렇게 떨어지진 않았을 거야. 그때가 기로였고, 결국 이렇게 비틀어졌어.” 김 과장의 목소리는 회색빛이다. 그에게선 땀냄새와 염료냄새가 진동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수동 정밀기계 공장에서 일하는 이영환(26)씨는 기술을 배워보고 싶어 병역특례가 끝난 후 공장에 재취직했다. “월급을 외국인 노동자들 수준으로 주려고만 하죠. 야근도 하는데 한 달에 잘 해야 80만원 벌어요. 그러니 차라리 피시방 알바 하겠다고 나가는 거죠. 그런 데는 180만원까지도 벌 수 있거든. 여기서 있으면 기술도 배우고 좋은데, 환경이 너무 안 좋으니까. 그리고 일한 노동의 가치가 요즘 기준보다 너무 낮게 책정되는 걸로 굳었으니까 남아있기가 힘들죠.” 언젠가 술이 취해서 들어온 아빠는 내 옆에 누워 혼잣말을 했다. “경화야, 너는 나중에 꼭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서 일해라. 나는 공고 가면서 자부심이 있었다. 기술이 좋았고, 장비 다루는 게 즐거웠다. 근데 지금은, 10년 하든 20년 하든 계속 제자리야.” 나는 자는 척했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꾹 참으며 다짐했다. 나중에 꼭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일할 거라고. 지난 23년 간 나는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항상 불쾌해했다. 아빠 얼굴은 왜 저리 까맣고, 땀 냄새는 언제쯤 없어질까.
성수동과 인천의 공장들을 취재하면서 나는 전주에 계신 아빠를 참 자주 보게 됐다. 깜짝 깜짝 놀라기도 여러 번이었다. 당신과 비슷하게 얼굴이 까맣고, 눈이 새빨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현장에서 스프레이기를 돌리고, 금형을 뜨고, 실더미를 나르는 사람들에게서도 체취를 느꼈다. 모두 우리 아빠였다.
70, 80년대 많은 젊은이들은 중소기업 공장으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몸으로 쌓은 기술은 오늘의 우리 경제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이 청춘을 바친 공장의 미래는 캄캄하다. 연수생을 받은 이후 임금 수준은 바깥 세상보다 낮게 떨어졌고, 작업환경은 낙후됐으며, 기술을 이을 후배들은 사라졌다. 바깥 사람들은 이 바닥에서 한 세대를 보낸 이들에게 3D 업종 종사자라고 한다. 어렵고(difficult), 위험하고(dangerous), 더러운(dirty) 일을 하는 이들이라고.
난 오늘도 이렇게, 시원한 사무실에서 고운 손으로 노트북을 두드린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면서 문득 떠올린다. 무심코 넘겼던 아빠의 앨범 속의 젊었을 때 사진. 색이 바랜 흑백사진 속 당신의 얼굴은 참 하얗다.
송경화 인턴기자(서울대 지리4) freehwa@naver.com
취재하면서 나는 아빠를 참 자주 보게 됐다
오늘, 그들이 청춘을 바친 공장의 미래는 캄캄하다 인천 부평구 알루미늄 처리 공장에서 만난 김신곤(47)씨. 그는 20년간 알루미늄 밥을 먹었다. 제대 후 할 일을 찾던 그에게 알루미늄 공장은 알루미늄만큼이나 반짝이는 은빛 꿈을 심어줬다. 취직 후 10여년은 참 즐거웠다. 기술도 배우고 밑으로 후배들도 들어왔다. 알루미늄 처리와 관련해 새로운 기계들도 속속 들어왔다. 일은 힘들었지만 자신도, 공장도 크고 있다는 생각에 기운이 절로 났다. 그는 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한다. 일이 정말 힘들어져버린 때를. “언제부턴가 설비투자가 끊겼어. 작업환경? 나아지기는커녕 10년 전으로 후퇴한 거야. 임금이 물가상승만큼만 올라도 살 수 있을 텐데. 여기 일을 3D라고 부르기 시작한거야.” 공장 안에는 화학제품 냄새가 진동한다. 그 밑으로 외국인 노동자 10명과 아줌마 1명이 있다. 그는 “누가 와서 배우려 하겠어? 나까지만 하고 끝나는거야. 진짜 슬픈거지”라고 한숨을 쉰다. 김씨의 얼굴은 참 까맸고, 눈은 충혈돼 있다. 서울시 성수동의 한 염색 공장. 공장 터 700평 중 200평만 기계를 돌리고 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바깥이 공장 안보다 오히려 더 시원하다. 90년대 초만 해도 직원 120명이 넘던 이곳에선 지금 40명도 안되는 직원들이 일한다. 40대 아줌마들과 외국인 노동자, 백발의 60대 남성들도 보인다.
현장 책임을 맡고 있는 김아무개(45) 과장은 할 말이 많다. “외국인 애들 길어야 3년인데 데리고서 뭘 해. 사업이 발전하려면 후진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정말 최악의 상황이야.” 그는 정부정책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애초부터 산업연수생을 받지 말아야 했어. 그때 이후 작업 환경, 복지시설 이런 데는 관심 하나도 안 갖고 싼 임금수준에 맛만 들인 거야. 당시 한참 돈 많이 벌었을 때 후생 복리에 투자했다면, 이쪽 노동시장이 이렇게 떨어지진 않았을 거야. 그때가 기로였고, 결국 이렇게 비틀어졌어.” 김 과장의 목소리는 회색빛이다. 그에게선 땀냄새와 염료냄새가 진동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성수동 정밀기계 공장에서 일하는 이영환(26)씨는 기술을 배워보고 싶어 병역특례가 끝난 후 공장에 재취직했다. “월급을 외국인 노동자들 수준으로 주려고만 하죠. 야근도 하는데 한 달에 잘 해야 80만원 벌어요. 그러니 차라리 피시방 알바 하겠다고 나가는 거죠. 그런 데는 180만원까지도 벌 수 있거든. 여기서 있으면 기술도 배우고 좋은데, 환경이 너무 안 좋으니까. 그리고 일한 노동의 가치가 요즘 기준보다 너무 낮게 책정되는 걸로 굳었으니까 남아있기가 힘들죠.” 언젠가 술이 취해서 들어온 아빠는 내 옆에 누워 혼잣말을 했다. “경화야, 너는 나중에 꼭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서 일해라. 나는 공고 가면서 자부심이 있었다. 기술이 좋았고, 장비 다루는 게 즐거웠다. 근데 지금은, 10년 하든 20년 하든 계속 제자리야.” 나는 자는 척했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꾹 참으며 다짐했다. 나중에 꼭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일할 거라고. 지난 23년 간 나는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항상 불쾌해했다. 아빠 얼굴은 왜 저리 까맣고, 땀 냄새는 언제쯤 없어질까.
송경화 한겨레 인턴기자 (서울대 지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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