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총과 더불어민주당, 정의당이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주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의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엄마가 바쁘다고 아기를 한끼 안 먹이고 나중에 먹이거나, 안 씻기고 재울 수는 없지 않나? 육아는 몰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지난해 아들을 출산하고 육아휴직 중인 김아무개(35)씨는 복직을 앞두고 윤석열 정부가 추진 중인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개편안) 소식을 듣고 착잡해졌다. 경기 지역의 한 공기업에 근무하는 김씨는 지역 주민 서비스 업무를 담당하는 특성상 주말 근무가 많다. 자신뿐만 아니라 금융권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일하는 남편도 근무시간이 더 길어지면 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하다는 김씨는 “업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는 부서는 사내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육아를 이유로 가면 눈총을 받는다”며 “휴직 전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고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기 일쑤였는데, 근무시간이 더 길어지면 아기를 키우면서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진지하게 퇴직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한영수 경기도일자리재단노조위원장(MZ노동자·오른쪽 둘째)이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주69시간 노동시간 개편안 폐기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고용노동부는 6일 개편안을 내놓으면서 “근로자 선호에 따라 주 4일제, 주 4.5일제로도 일할 수 있고, 맞벌이 부부의 경우 자녀 등하원에 맞춰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는 등 워라밸(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일과 생활의 균형)이 향상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은 19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현실을 전혀 모르는 탁상공론”이라고 한목소리로 꼬집었다.
우선, 양육 상황을 고려해 노동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직장 분위기가 아니라고 토로했다. 제약계 대기업 영업사원인 정아무개(37)씨는 업무 특성상 일주일에 한두번 밤 10시가 훌쩍 넘어 귀가한다. 이렇게 퇴근이 늦는 날, 남편 야근까지 겹칠 경우 남편이 일단 집으로 가 세살 아들을 돌보면서 밤늦게까지 재택근무를 할 수밖에 없다. 정씨는 “남편의 육아 참여도가 높고, 부모님 도움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아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둘째를 낳고 싶다가도 이대로는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부 개편안에도 ‘양육(돌봄) 시간’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찾아볼 수 없다. 노동부는 13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야근, 야근, 야근…기절, 가상근무표 이게 진짜야?’라는 제목의 홍보자료와 함께 ‘연장근로 근무표 예시’를 게재했다. 정부 개편안에 대한 비판을 해명하기 위한 근무표였지만, 월·화·수·목·금 평일 내내 밤 9시까지 일하고 토요일에도 저녁 8시까지 근무하는 것으로 돼 있어 “언제 누가 아이를 돌보냐?”는 비판이 잇따랐다.
자녀를 어린이집·유치원 등에 보내더라도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기 위해선 하루 최소 4시간에서 6시간은 필요하다고 부모들은 입을 모은다. 즉 아이를 양육하며 주 52시간을 일하면, 일주일 노동시간은 70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더구나 돌봄으로 인한 추가 노동은 여성에게 더 많이 전가되고 있다. 진짜 워라밸을 위해선 노동시간 총량을 줄이는 한편, 언제 일할지 예측 가능성도 높여야 하는데 ‘특정 기간 몰아치기 노동을 가능케 하는’ 정부 개편안은 이러한 방향에서 거꾸로 가고 있다. 일·육아 병행이 어려운 현실은 결혼 기피와 출산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
장하나 정치하는엄마들 사무국장은 “아이는 정시에 먹고, 정시에 학교를 갔다 오기 때문에 돌봄노동은 절대 유연해지지 않는다”며 “현행 (연장근무를 포함한) 주 52시간만 해도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없어 한명이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노동시간 감소를 원하는 국민의 요구에 반하는 개편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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