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한 직후인 2021년 7월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팁스타운에서 열린 ‘스타트업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주 최대 69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방안이 삐걱대고 있습니다. 이른바 ‘엠제트(MZ) 세대’의 분노를 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3일 공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서 ±2.0%포인트) 결과를 보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한 주 전보다 4.0%포인트 하락한 38.9%로 나타났고, 부정 평가는 5.7%포인트 오른 58.9%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부정 평가의 경우 20대에서 13.0%포인트, 30대에서 11.3%포인트나 급상승했습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이 조사는 고용노동부가 노동시간 개편방안을 입법예고한 지난 6일부터 시작해 닷새 동안 이뤄졌습니다.
대통령실은 초비상입니다. 윤 대통령은 16일 “연장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며 보완 지시를 했다고, 안상훈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밝혔습니다. 대통령실에 비상이 걸린 건, 여론조사와 더불어 최근 출범한 이른바 ‘MZ노조’인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의 반발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는 지난 9일 입장을 내어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는 국제사회 노동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송시영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 부의장은 16일 <시비에스>(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개편 방안을 두고 “취지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며 “사측에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주 최대 69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몰아서 쉬면 된다는 입장이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몰아서 쉴 수 있는 권리를 누리기 어렵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공공기관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보장된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마저 이런 입장이니,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가 많은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더더욱 권리 요구가 어려울 겁니다. 윤 대통령의 ‘공정’·‘노동개혁’ 행보에 MZ 세대를 대표한다는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가 우군이 되어줄 것이라고 여겨왔던 대통령실 입장에선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발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개편방안의 첫 단추였던 윤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주 120시간 노동’ 발언부터 오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3월4일 검찰총장직에서 사퇴하고 117일 만인 6월29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이후 7월19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을 합니다. 그때의 발언은 이렇습니다.
“현 정부는 주 52시간제로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했지만 일자리 증가율이 (작년 중소기업 기준) 0.1%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실패한 정책이다.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 52시간 제도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발언이 거센 논란에 휩싸이자 윤 대통령은 다음날인 7월20일 “제가 만난 스타트업 현장의 청년들의 목소리와 문제의식에 공감하여 그대로 전달한 것”이라고 해명합니다. 그렇다면 궁금해집니다. 윤 대통령이 만났다고 말한 이 ‘스타트업 청년들’은 누구일까요?
윤 대통령은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을 하기 전 두 차례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첫번째 만남은 대선 출마 선언 전인 2021년 5월24일입니다.
<매일경제>의 보도를 보면, 윤 대통령은 ‘물밑 대선 수업’의 일환으로 2030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만나 2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이때 참석자는 블록체인 게임 개발업체 나인코퍼레이션의 김재석 공동대표, 블록체인 창업자를 위한 공유 공간 논스를 운영하는 하시은 대표, 일반인 코딩 교육 플랫폼의 팀스파르타 이범규 대표 등 3명입니다.
두번째 만남은 대선 출마 선언 직후인 2021년 7월8일입니다. 윤 대통령은 당시 ‘윤석열이 듣습니다’ 두번째 행보로 스타트업계 대표들을 만나 1시간30여분 동안 의견을 들었는데요. 이때 참석자는 고영하 한국엔젤투자협회 회장,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 박경희 법무법인 린 변호사, 장지호 닥터나우 대표, 남성준 다자요 대표, 김기동 코나투스(반반택시)대표, 김세영 서울거래소 대표, 정호정 카이아컴퍼니 대표 등 8명입니다.
첫번째 만남은 대선 출마 선언 전이어서 공개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매일경제> 보도에 윤 대통령이 ‘블록체인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시연해보고 코딩 분야 속성 과외도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반면 대선 출마 선언 뒤인 두번째 만남은 공개된 자리였습니다. 당시 <한겨레>의 취재 기록을 보면, 이 자리에서 가상자산이나 핀테크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법무법인 린의 박경희 변호사는 “사업하는 분들을 범죄자로 안 만드셨으면 좋겠다”며 “주 52시간제도 걱정되는데, 위반하면 형사처벌된다. 대표님이 잡혀가면 스타트업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만남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주 52시간제에 대한 질문에 “스타트업 최대 강국 미국 같은 경우는 화이트칼라, 프로페셔널에 대해서는 노동 규제 예외가 많이 인정된다”며 “글로벌 경쟁을 위해서는 노동 규제와 보상 방식에 대해 좀 더 자유롭게 하는 것이 스타트업 운영에 도움이 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인 임이자 의원이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향 토론회에서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 유준환 의장 등 참석자들에게 근로시간 제도 개편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윤 대통령이 만난 스타트업 청년들은 모두 스타트업을 경영하는 ‘사용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특정한 시기에 장시간 노동이 가능하도록 노동시간을 유연화하는 방안이 경영에 유리하다는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6천명 정도의 가입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는 사용자가 아니라 엄연히 ‘노동자’ 집단입니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일한다고 해도, 이들이 ‘몰아서 휴가를 쓸 수 있는’ 권리를 쉽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유준환 새로고침노동자협의회 의장도 1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민의힘 간사인 임이자 의원이 주최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향 토론회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애초에 (개편안에 대해) 반대를 했다”며 “요구 자체가 노동계에서 하는 요구보다는 경영계가 하는 게 더 크다”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스타트업 사용자들의 ‘고충’을 듣고 ‘주 120시간 노동’ 발언을 했고, 정부 출범 뒤 고용노동부는 이 기조를 그대로 이어와 ‘주 최대 69시간’ 노동까지 허용하는 노동시간 개편방안을 내놓은 겁니다. 그러니 노동시간 개편방안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상태에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겁니다. 윤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며 추가 개편방안을 내놓을 게 아니라, 아예 개편 방안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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