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개발한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 연합뉴스
“오늘 아침 세계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백신이 등록됐다.”
지난해 8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국에서 만든 코로나19 백신 사용을 허가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세계에 알린 일을 기억하시나요? 러시아에선 이 백신이 세계 최초의 코로나19 백신이라며, 소련 시절이던 1957년 세계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의 이름을 따 ‘스푸트니크 브이(V)’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에 대한 당시의 시선은
대부분 부정적이었습니다. 임상 시험을 3상까지 진행하지도 않고 사용 승인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국제 의학계에 제대로 공개하지도 않았는데 덮어놓고 환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달 초부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국제 의학 학술지 <랜싯>에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의 임상 3상 결과,
91.6%의 면역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왔다는 발표가 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랜싯>은 동료 의료 전문가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거쳐야 실릴 수 있는 국제적인 권위의 학술지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컸습니다.
이에 그동안 소극적이던 나라들이 스푸트니크 브이 도입에 나서면서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몽골이 23번째로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의 긴급 사용을 승인했다고 합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 2일(현지시각) 방송에 출연해 “러시아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이 좋은 데이터를 보여줬다”며 “유럽연합(EU)은 모든 백신을 환영한다”고 말하면서 독일에서도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 도입이 임박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이 “‘물과 차이가 없다’는 조롱을 듣던 러시아 백신이 반년 만에 인류 희망으로 급부상했다”고 평가한 대목은 현재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은 어떤 백신일까요. 우선 이 백신은 ‘바이러스 벡터(전달체)’ 방식으로 국내에서 접종 예정인 아스트라제네카·얀센 백신과 같은 방식을 씁니다. 코로나19 항원 유전자를 인체에 무해한 아데노바이러스 등 다른 바이러스 주형(틀)에 주입해 체내에서 생성된 항원 단백질로 면역 반응을 유도합니다. 특히 냉동이 아닌 냉장 보관으로 유통이 가능하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스푸트니크 브이는 분말로 보관할 경우 2~8도에 냉장 보관이 가능하고, 액상은 영하 18도에서 6개월가량 보관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화이자처럼 영하 70도 초저온 유통이 필요한 백신에 견주면 운송과 보관이 편리합니다. 가격도 두 번 접종에 20달러(약 2만2000원)로 화이자(40달러)·모더나(50~74달러) 등에 견줘 훨씬 저렴한 편입니다.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은 이미 국내에서도 생산하는 중입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춘천에 있는 한국코러스 공장에서 1억5천만회분을 위탁 생산해 전량 중동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 개발 지원과 국외 생산 및 공급을 맡은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가 국내업체인 지씨(GC)녹십자와도 위탁 생산 계약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지난 9일(현지시각) 이란의 수도 테헤란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가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이렇게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은 중동, 동유럽, 남미 등 기존 서구권 백신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던 국가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도입되고 있습니다. 한 사례를 보실까요. 코로나 관련 국제 정보를 수집하는 ‘아워월드인데이터’를 통해 백신을 한 차례라도 맞은 사람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면, 지난 6일을 기점으로 아랍에미리트(UAE)가 이스라엘을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7일 기준으로 아랍에미리트는 41.1%, 이스라엘는 40.2%였고, 이후에도 격차를 벌려가고 있습니다. 아랍에미리트의 접종 속도가 빠른 것은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해 백신을 일찍부터 대량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화이자 백신만 접종하는 이스라엘과 달리 아랍에미리트는 화이자 백신과 함께 러시아 스푸트니크 브이와 중국 시노팜 백신도 함께 접종하고 있다는 점이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에 대해 백신 공급의 불확실성과 변이로 인한 여타 백신의 효과성 저하 등을 들며 검토 대상으로 올려놓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질병관리청장)은 지난 8일 대국민 브리핑에서 “
러시아 스푸트니크 백신 관련해서는 저희가 변이라거나 공급의 이슈 이런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추가 백신에 대한 확보 필요성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는 계속 검토는 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전문가들은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의 설계에서 예방률이 높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1차와 2차 접종에 사용하는 아데노 바이러스의 종류를 다르게 해서 ‘간섭’ 현상을 줄였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1차 접종으로 생긴 항체로 인해 면역이 형성되면, 이것이 되레 2차 접종의 효과를 줄일 수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가 개발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접종 간격에 따라서 예방 효과가 차이를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은 간섭 현상 때문으로 알려졌습니다. 옥스퍼드대는 최근 새로 진행된 아스트라제네카 임상시험을 분석한 결과, 1, 2차 접종 간격을 6주 미만으로 했을 때는 예방 효능이 55%였지만, 간격을 12주 이상으로 했을 때는 82%로 예방 효과가 훌쩍 뛰었다고 이달 초에 발표했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1, 2차 접종에서 동일하게 침팬지에 감기를 유발하는 아데노 바이러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은 1차 접종엔 사람 아데노 바이러스26을, 2차 접종은 사람 아데노 바이러스5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선 같은 아데노 바이러스를 사용하는 두 백신을 교차해서 접종하면 더 효과가 좋아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실제로 검증에 들어갔습니다. 지난 9일(현지시각)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는 아제르바이잔이 스푸트니크 브이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결합 접종 임상시험을 승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같은 전달체(벡터)를 기반으로 한 두 백신의 결합 접종 시험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3개국에서 각각 100명씩의 자원자를 대상으로 6개월 동안 진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소련 이후 최대 성과’라는 평을 듣는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에 대해서 국내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국내 백신 전문가 3명에게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이 국제 의학 학술지에서 동료 평가를 거쳐 다른 백신과 같이 과학적 검증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과학적 검증을 받았다면 제조 국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송만기 국제백신연구소 사무차장도 “스푸트니크 백신의 설계를 보고 이전부터 좋은 임상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습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창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은 “연구 결과가 좀 더 나와야 하지만 현재 결과만 보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며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의 임상시험이 다른 백신의 임상에 비해 좋았던 점은 모든 백신 접종자에게 유전자 증폭(PCR) 검사를 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는 무증상 감염자도 있기에 이 부분에 관해 확인을 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스푸트니크 백신에 대한 이런 긍정 평가와 별개로 우리나라가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을 도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전문가들은 서두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견해를 보였습니다. 의료강국으로 인식되어온 미국, 영국, 독일 등지에서 개발하고 생산하는 국내 도입 백신 5종에 견줘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의 개발·생산국인 러시아의 신뢰도가 낮고, 스스로 신뢰 저하를 자초한 점이 있었다는 이유였습니다. 송만기 사무차장은 “백신은 과학적 신뢰만큼이나 사회적 신뢰도 중요하다. 러시아가 20여명만을 대상으로 임상 1상을 진행하고, 결과도 학술지가 아닌 언론에 먼저 발표하는 등의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신뢰를 깎아 먹었다”며 “우리나라는 이미 전 국민 숫자보다 많은 백신을 확보한 상황이니 서두를 것은 없다. 미국이나 유럽 주요 국가들이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을 도입하는 상황을 보고 따라가도 늦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마상혁 부회장은 “의학적인 면만 보면 나쁘지 않은데 국민적인 신뢰에 문제가 있다. 러시아와 의료적인 면에서 거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백신에 대해서 물음표를 달 수 있다”며 “만약 필요한 상황이 된다면 우리가 직접 검증해서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정재훈 교수는 “러시아의 과학기술 분야는 신뢰할만하다. 백신 수급 문제를 보완하고 접종 일정을 앞당길 수 있다면 충분히 도입을 검토해볼 수 있다”며 “다만 어차피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을 당장 도입할 수 없는 상황이고, 아직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실험 결과도 나오지 않았으니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백신 수급에 차질을 빚는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당장 이달 중순에 코백스 퍼실리티(세계 백신공동구매 연합체)를 통해서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던 화이자-바이오엔테크 백신 6만명분(11만7천회분)이
이달 내로 도입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코백스 퍼실리티에서는 지난달 30일 ‘최소 260만, 최대 440만회분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상반기에 공급하겠다’고 우리 정부에 통보한 바 있는데, 정부는 지난 3일
최소 기준에 해당하는 260만회분만 공급받기로 최종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백신 도입의 첫 출발부터 불안한 모습입니다.
10일(현지시각) 아스트라제네카를 생산하는 벨기에 스네프에 있는 서모 피셔(Thermo Fisher) 공장에서 방호복을 입은 직원이 취재진을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백신 확보에 애가 타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유럽연합 같은 곳에서도 백신 확보에 차질을 빚어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지난달 말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벨기에에 있는 아스트라제네카 공장에 점검을 나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 쪽에서 원재료와 제조 능력 부족으로 1분기에 유럽연합에 제공할 백신의 양을 60% 줄일 수밖에 없다고 통보해오자, 이런 사유가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점검 결과 회사 쪽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합니다.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는 “다국적 제약사들이 계약 규모가 커지면 시장 선점 등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생산 능력을 넘어서는 계약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계약했다고 그대로 이행할 것이라고 믿고만 있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역내에 백신 생산 공장을 여럿 둔 유럽연합에서도 백신 확보에 문제가 생기는데 과연 우리나라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요?
백신 도입 일정에 큰 차질이 생겨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까지 도입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정부는 신뢰도가 높지 않은 백신을 접종하기 위해 국민을 설득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됩니다. 부디
정부가 밝힌 백신 도입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돼서 “11월 국민 70% 접종으로 집단면역 형성”이란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