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시각장애인의 살아남을 권리를 지키는 부모모임’에서 헌재 결정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현장] ‘자활 꿈 꺾인’ 서울맹학교 학생들 거리로 나서다
시각장애인들외에도 안마사가 될 수 있다는 지난 5월25일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섰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정말로 “눈 앞이 캄캄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은 마포대교 난간에서 열흘 넘게 고공공성을 하고 있다. 눈 앞이 안 보이는 이들 중 8명은 한강으로 투신을 감행하기도 했다. 한 시각장애인은 헌재 결정 이후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나라의 전체 시각장애인은 20만명으로 추정되고, 이들 중 6000여명이 안마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헌재의 결정은 이미 ‘안마사’가 된 시각장애인들에게 생존기반 박탈이라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지만, 시각장애인이 된 것에 좌절하지 않고 ‘자립기술’을 배워 스스로 독립하려는 어린 시각장애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장애가 있지만 이를 딛고 자립의 꿈을 키워 사회에 진출하려던 이들 어린 시각장애인은 출발하기에 앞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다. 결국 어린 시각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섰다. 7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있는 국립 서울맹학교를 찾았다. 재판관 가족 중 시각장애인 있었더라면…
“헌재 재판관님들 가족 중에 시각장애인이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결정이 나왔을까요?” 7일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의 국립 서울맹학교 앞 시위 현장에서 만난 오경훈(23·시각장애 3급·맹학교 고등부 이료반 3학년)씨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오경훈씨는 17살 때 녹내장의 후유증으로 시력을 상실했다. 오씨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생계가 막막해지자 스스로 찾아온 곳은 맹학교였다. 하지만 5월25일 헌재의 ‘시각장애인 안마사 독점 위헌’ 결정을 언론을 통해 접한 뒤 말 그대로 ‘막막’해졌다. 자격증을 따도 취업 보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오씨는 “결정이 번복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지만, 재판관들이 너무나 야속하다”며 “국민들도 월드컵 때문에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서울맹학교의 전기치료 실습실 내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한국안마’ 유학온 벽안의 시각장애인도 한숨 맹학교 교문 옆에는 벽안의 한 시각장애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3년 전 안마를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온 타지키스탄 국적의 스페르타(27·맹학교 1학년)였다. 스페르타는 테러로 부모님을 잃고 한국인 선교사를 따라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안마와 침술을 배워 고향에서 맹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아직은 서투른 한국말로 말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전해 들은 후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날 위기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인터뷰 내내 스페르타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깊은 한숨으로 대신했다. 전문대를 졸업한 후 맹학교 이료반에 진학한 이덕희(29)씨는 이름도 생소한 ‘망막색소변성증(RP)’이란 희귀병으로 20살 때 시력을 잃었다. 시력을 잃은 후 피아노 조율사도 해보고, 맹인복지회관에서 텔레마케터 일도 해보았다. 하지만 “정안인과의 경쟁에서 실패했다”고 그는 말했다. 정안인과의 경쟁으로부터 비켜나 있는 유일한 분야인 안마사가 되기 위해 맹학교에 들어왔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불투명한 미래뿐이다. 이씨는 “결정이 번복되기 힘들다는 것은 알지만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작은 보호 장치도 마련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섣불렀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동진이도 안마사가 되려 했는데…” 학부모들도 가세 맹학교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대로변 횡단보도 앞에선 시각장애인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100여명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이동진(11·시각장애1급)군의 어머니인 강혜선(46)씨는 “이제 동진이는 초등학생이지만 결국 안마사를 택할 수 밖에 없다. 이번 결정으로 아들의 앞날이 너무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왜 꼭 자녀의 직업을 안마사로만 생각하느냐”고 묻자 강씨는 “시각장애인의 특성상 성인이 되어도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항상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안마사란 직업은 시각장애인들간 일종의 커뮤니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7일 ‘국립 서울맹학교’ 학생들이 헌재 결정에 항의하는 수업거부 농성을 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dksd
학부모들은 이미 ‘시각장애인의 살아남을 권리를 지키기 위한 부모 모임’도 결성해 성명를 배포하고 청와대에 전달할 서명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비장애인들의 직업선택에 대한 자유만큼이나 절박하고 소중한 것이 사회적 약자인 시각장애인들의 생존과 인권”이라며 “시각 장애인의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시각장애인이 안마사 자격증 취득하기까지 1913년에 개교한 국립 서울맹학교(교장 김기창)는 세워진 지 90년이 넘는 유서 깊은 학교다. 그동안 123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003년부터 일반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반’도 개설했으나 주 교육과목은 안마와 침술 등을 가르치는 이른바 ‘이료’ 과목이다. 학교 쪽에서 제공한 졸업생 현황 자료를 봐도, 역대 졸업생의 68%가 안마 계통의 일을 하고 있다. 서울맹학교에서는 3년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안마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학생은 이료반에 입학 후 1학년 주당 9시간, 2학년 주당 23시간, 3학년 주당 25시간의 이료과목을 이수하게 된다. 교육과정은 인체를 이해하는 해부·생리학 기초부터 안마와 침구·진단·실기까지 총 9과목에 이른다. 일반학교처럼 중간·기말 고사도 본다. ‘유급제’도 존재한다. 학년당 평균 성적이 60점이 안되면 유급이고, 2번 이상 유급을 당하면 전학을 가던가, 인문반으로 옮겨야 한다. 고3 때는 주당 12시간의 실습을 하게 되는데, 인근 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이 인기가 높아서 실습실의 침대가 꽉 찰 정도다. 서울맹학교의 김인희 교사는 “‘하드트레이닝’이라서 굉장히 어려워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넓어지는 ‘직업선택의 자유’에 “빼앗기는 시각장애인 생존권” 대한안마사협회의 자료를 보면 현재 전국의 안마시술소는 1073곳이고, 자격증을 가진 안마사는 6804명이다. 통계상 한 업소당 대략 7명의 안마사가 고용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헌재의 결정으로 인해 ‘정안인’들도 안마사가 자격증을 딸 수 있게 된다면,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의 설 자리가 그만큼 좁아지는 것이다. 맹학교의 김인희 교사는 “졸업생들에게 안마시술소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는 전화가 많이 온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정안인’ 안마사를 두고 굳이 시각장애인 안마사를 고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맹학교 학생인 스페르타(왼쪽)와 오경훈(오른쪽)씨.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보건복지부는 6월 중순까지 의료법 개정안을 만들기로 했다. 개정안을 만드는 과정에는 안마사협회 대표 2명이 참여한다. 현재 ‘할당제’가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안마사의 30%를 장애인에게 할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외에 자격증 시험에 대해 가산점을 부여하는 법, 보건소 및 관공서에 의무적으로 시각장애인 안마사를 고용하는 법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 대부분은 “시각장애인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법만 바꾼다고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고 입을 모은다. 김인희 교사도 “밤일 하는 것 뻔히 아는데 굳이 안마사에만 목을 매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부에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겨레〉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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