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9년 2월 21일 한겨레신문 1면 ‘발행인의 편지’
송건호 대표이사
지난해 9월 21일부터 <한겨레신문> 발전기금 1백억 원을 모으기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국민 여러분의 성원으로 모금액이 30억 원을 넘어섰읍니다. 이 기금은 고속 윤전기와 사옥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2~3개월 안에 모금목표를 달성해 상반기 중에 40~50억 원 하는 고속윤전기를 발주하고 사옥신축에 착수할 계획입니다. 창간 9개월 만에 발행 부수가 40여만 부에 이르렀고 경영 또한 적자를 면하게 되었으나 신문의 발전을 위해 1백억 원의 새로운 기금을 모으는 것은 늘어나는 독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면수도 16면으로 늘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자면 최소한 고속윤전기 1대를 들여오고 이 윤전기를 설치할 사옥을 마련해야 하는데 현재의 경영 형편으로는 소요자금을 스스로 조달하기 어려워 국민 여러분의 지원을 또 한 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저희들이 새 신문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오늘의 신문들이 독자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일관성이 없고 때에 따라 편리하게 권력에 아부하며 중요한 문제일수록 공정하고 솔직하게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었읍니다. 이로 인해 국민들은 주변 정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신문과 텔리비전에 우롱당해 왔읍니다. 진실된 신문을 만들어 국민의 눈과 귀를 트이게 하자는 것이 저희들이 새 신문을 만들고자 하는 목적이었읍니다. 오늘의 기성언론인들이 공정한 보도를 제대로 못 하게 된 것은 그들이 윤리적으로 특히 나쁘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언론기업은 개인이 투자해서 만든 것이므로 사주들은 먼저 신문을 통해서 치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투자한 사주들이 언론기업에서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50년대 한국언론은 기업으로서 규모는 작았어도 독립성이 있었으므로 상당한 정도로 자주성을 지킬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는 군사통치자들이 '근대화과정'에서 신문기업에 온갖 특혜를 베푸는 한편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이 관계없는 타기업에 진출시켜 신문기업주들을 50년대와는 달리 영리만을 추구하는 장사꾼으로 전락시켰읍니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언론기업주들은 공정하고 솔직한 신문을 만들기보다 그때그때 권력에 영합하여 사세를 확충하고 치부를 위해 신문을 이용하는 지경에 이르렀읍니다. 게다가 5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언론인들이 대량 권력에 참여하여 언론계의 순수성을 여지없이 오염시키고 말았읍니다. 언론인이라고 해서 권력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권력은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갖은 악정을 자행하며 반항하는 국민을 그럴싸한 명분을 붙여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읍니다. 지식인이 권력에 참여할 때는 가진 바 지식을 정책에 반영시키자는 데 뜻이 있을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는 지식인의 권력 참여가 이런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의 예로 보아 국민을 억압하고 궤변을 농하는 데 지식을 악용하는 예가 많습니다. 따라서 권력에 참여하는 지식인들은 권력의 하수인 구실을 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지식인이 일단 권력에 참여하면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됩니다.
<한겨레신문>은 신문의 주인이 개인이 아니고 국민이기 때문에 치부에 집착하거나 권력에 영합할 필요 없이 언제나 공정하고 정직한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읍니다.
게다가 <한겨레신문>에는 권력에 영합하거나 아부하는 데 신문을 이용하려는 언론인들이 없읍니다. 저희 신문에서는 오랜 고생을 견디어낸 언론인들과 참신하고 패기 있는 언론인들이 함께 일하고 있읍니다. <한겨레신문>은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지 결코 특정 권력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저희 신문은 특정 세력이 아니라 국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절대로 공정한 신문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읍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은 권력에 아부하고 개인의 치부에 치우치는 신문만 가지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세계언론사상 국민주주 수만 명의 지지로 신문사를 만든 예가 없기 때문에 <한겨레신문>은 국제적 관심을 끌고 있읍니다. 저희 신문에서는 4백여 명의 사원이 고용·피고용 관계가 아니라 따뜻한 우애 속에서 동지의 관계로 일하고 있읍니다. <한겨레신문>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국민의 확고한 지지가 있는 한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해서 국민의 여론을 성실히 대변할 것입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