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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현실 아닌 ‘역사의 길’ 걸은 큰 언론인

등록 2021-12-20 18:43수정 2021-12-21 18:25

송건호 선생 20주기에 부쳐
21일은 청암 송건호 선생의 20주기다.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회원이며 송건호 선생 글의 출간 작업을 대부분 맡았던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글을 싣는다. 편집자

1987년10월30일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에서 송건호 당시 창간위원장이 창간사를 하는 모습. “다시 젊어진다 해도 신문기자를 할 것”이라고 말했던 송건호 선생은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사임한 뒤 13년 만에 한겨레신문 대표이사를 맡으며 신문으로 돌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10월30일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에서 송건호 당시 창간위원장이 창간사를 하는 모습. “다시 젊어진다 해도 신문기자를 할 것”이라고 말했던 송건호 선생은 197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사임한 뒤 13년 만에 한겨레신문 대표이사를 맡으며 신문으로 돌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큰 언론인 송건호 선생은 한참 후배인 나에게 늘 ‘김형’이라고 불렀다. 책 만드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격려해주었다. “출판인에게 책 만드는 일은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나는 선생을 매일같이 만났다. 박정희와 전두환 권력이 살인적인 폭력을 휘두르던 시대였지만 선생은 늘 희망을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에게 우리 현대사에 관해서 물었고 선생은 자신의 체험과 공부와 생각을 이야기했다. 선생의 말씀을 듣다 보면 어느새 밤이 깊어갔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찬란한 자유언론운동! 이 언론운동의 선두에 선생이 서 계셨다. 역사와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과 언론운동의 정신이고 이론이었다.

나는 1975년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뒤 신문사로 복귀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1976년 연말에 출판사를 등록하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정신과 사상, 내일을 전망하는 살아 있는 역사를 담아내는 책들을 만들고 싶었다. ‘오늘의 사상신서’라는 총서를 설정하고, 그 첫 책으로 송건호 선생의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를 1977년 가을에 펴냈다.

선생과의 만남과 대화는 한권의 책을 기획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79년 10월15일,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는 10·26 정변 열하루 전에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에 발표된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도 선생과의 대화 과정에서 메모한 주제였다. ‘해전사’ 기획을 설명해드리자 “참 좋은 구상”이라면서 바로 글을 쓰셨는데, 민족주의자 송건호의 주체적 지성을 담아낸 대표적인 글이 되었다. 나는 잇따라 한국현대사에 관한 주제를 말씀드려 우리가 펴내는 무크지 <한국사회연구>와 <계간 오늘의 책>을 통해 발표하시게 했다.

한 지식인은 그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어떤 상황에 가혹하게 내던져짐으로써 그 상황의 구조와 성격을 심층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송건호는 1975년 3월14일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를 내던짐으로써, 이 땅의 현실을 깊이 성찰하는 저술을 더 왕성하게 해낸다. 1970년대와 1980년대라는 가혹한 정치 현실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각성시키는 ‘저자 송건호’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1978년 나는 15인의 에세이집 <어떻게 살 것인가>를 펴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당시 우리 모두의 화두였다. 선생은 ‘상식의 길: 한 언론인의 비망록’에서 분단시대를 사는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자세를 말했다.

“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한낱 재능인으로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쓰고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 같아서는 안 된다. 이 땅의 언론은 국제 냉전의 하수인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생존과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

선생은 1984년 김구·여운형·안재홍·김창숙·함석헌 등 민족지도자론을 담은 <한국현대인물사론>을 출간한다. 이 저술로 선생은 제1회 심산상을 수상한다.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쓰게 된 심산 김창숙 선생 편을 쓰다가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했다. 떨어지는 눈물이 원고를 적셨다. 도봉산 자락 심산의 묘소를 찾아가 엎드려 통곡했다.

“역사의 길이란 형극의 길이자 수난의 길이다. 온갖 세속적 가치로부터 소외되는 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역사의 길을 택하지 않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길을 걷는다.”

지난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에서 고인을 회고하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지난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송건호 선생 20주기 세미나에서 고인을 회고하는 김언호 한길사 대표.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2002년 12월, 선생의 서거 1주기를 맞아 나는 <송건호전집> 전 20권을 기획했다. 언론인이자 역사가로서의 송건호의 사상과 정신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산과 들에 꽃 피는 봄날이면, 1980년 ‘서울의 봄’이 나의 가슴에 선연하게 떠오른다. 나라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민주주의를 향해 행진하던 그 봄날, 서대문 충정로의 기독교 장로회 선교교육원에서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주도하던 선생을 도와 그 선언문을 등사하던 그 봄날이 그리워진다.

“나는 역사의 길을 걷겠다!”

신념에 찬 선생의 말씀이 청정하다. 온화하던 큰 언론인 송건호 선생이 오늘 우리 모두의 가슴에 살아 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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