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30년-디지털 아카이브]
1989년 2월 5일 한겨레신문 7면
송건호 대표이사
선생님의 부음을 이른 새벽 몇몇 분께서 전화로 알려 주셨읍니다. 아침 텔리비전 뉴스에 비친, 엄해 보이면서도 자애롭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생전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졌읍니다.
선생님께서는 20세기가 열리던 1901년생이셨으니 여든아홉의 수를 하셨읍니다. 우리네 통념으로는 '호상'이라 할 수도 있겠읍니다만, 민족의 고난과 불행을 온몸으로 아파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선생님의 서거를 '호상'이라 하기엔 어딘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 겪으신 여러 차례의 옥고가 그러한 심정을 더해 줍니다.
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맨 먼저 떠오른 것은 “아 이제 한 시대가 가는구나”하는 아득한 느낌이었읍니다. 선생님처럼 평생을 야인으로 보내며 백성과 고난을 함께 하고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신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선생님을 선비라고 일컫지 않는 것도 선생님은 언제나 민중을 벗 삼아 '들사람'으로 시종한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의 개인 잡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씨의 소리>만 보더라도 선생님이 얼마나 철저한 '들사람'의 정신과 행동력의 소유자인가를 한눈에 알 수 있읍니다.
선비란 무엇보다 고고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순수하면서도 민중적인 분위기를 지니셨읍니다. 그 순수함과 민중적 풍모가 선생님의 고고함을 더해 주었읍니다.
제가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시게 된 것은 70년대부터였읍니다. 박정희 군사독재 아래서 온 나라가 얼어붙은 듯 침묵하던 어두운 시절, 선생님은 홀로 군사독재와 정면으로 맞섰읍니다.
물론 그에 앞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 한 편으로 온 백성의 심금을 치고 이승만 독재를 뒤흔들어 놓고 끝내는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은 선생님만이 해내실 수 있는 일이었읍니다.
여든 고령에도 선생님은 늘 젊은이처럼 열정적이셨고 또한 꾸밈없는 소박한 분이셨읍니다. 또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꼭 높은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읍니다.
이제 선생님은 가시고 저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보여주신 민주주의를 위한 불굴의 저항 정신과, 들사람의 '행동하는 지성'의 참뜻은 길이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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