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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일반

내 가슴속 촛불은 아직도 타오른다

등록 2017-10-28 14:03수정 2017-11-02 10:32

[토요판] 커버스토리
촛불 1년-시민 6명이 말하는 ‘나의 촛불’
뜨거웠던 광장에서…
‘커다란 하나’였던 우리
촛불은 이제 내 삶 속에서 타오른다
1년 전, 나라를 뒤흔든 국정농단의 폭풍 속에 촛불이 피어올랐다. 믿을 수 없는 뉴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던 그때, 지역과 나이·성별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시민들이 2016년 10월29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시민들은 청와대로 행진하는 길을 평화로운 시위로 열었고, 빨간 손팻말에 촛불을 비춰 귀 막고 부패한 권력을 향해 레드카드를 펼쳤으며,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가득 메운 촛불의 파도를 일으키는 장관을 빚었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시민들이 만들어낸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이게 나라냐’ 한탄하던 세상을 ‘이게 나라다’라고 보여주며 바꿔가고 있다. 그날로부터 올해 4월29일까지 모두 23차례에 걸친 촛불집회의 특징적인 장면을 담은 사진 23장을 모아봤다. 지난 24일 오후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온 광화문광장에 그날의 기억들을 펼쳐놓고, 퇴근길을 서두르는 차량들의 불빛 궤적을 장노출로 촬영했다. 이정아 김명진 기자 leej@hani.co.kr
1년 전, 나라를 뒤흔든 국정농단의 폭풍 속에 촛불이 피어올랐다. 믿을 수 없는 뉴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던 그때, 지역과 나이·성별로 구분 지을 수 없는 시민들이 2016년 10월29일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시민들은 청와대로 행진하는 길을 평화로운 시위로 열었고, 빨간 손팻말에 촛불을 비춰 귀 막고 부패한 권력을 향해 레드카드를 펼쳤으며,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가득 메운 촛불의 파도를 일으키는 장관을 빚었다. 진흙 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시민들이 만들어낸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이게 나라냐’ 한탄하던 세상을 ‘이게 나라다’라고 보여주며 바꿔가고 있다. 그날로부터 올해 4월29일까지 모두 23차례에 걸친 촛불집회의 특징적인 장면을 담은 사진 23장을 모아봤다. 지난 24일 오후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온 광화문광장에 그날의 기억들을 펼쳐놓고, 퇴근길을 서두르는 차량들의 불빛 궤적을 장노출로 촬영했다. 이정아 김명진 기자 leej@hani.co.kr

▶ 2016년 10월29일. 세계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촛불혁명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날이다. 1차, 2차, 3차…. 매 주말 촛불집회가 열릴 때마다 전국의 거리와 광장엔 갈수록 더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번째 촛불집회가 열린 날로부터 정확히 1년. 국정을 농단하던 전직 대통령과 그 무리들은 자리에서 쫓겨나 법의 심판을 받고 있다. 촛불 1년. 지난겨울 ‘커다란 하나’였던 우리 모두에게 촛불은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지난겨울 촛불을 들었던 우리는 커다란 하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돈도 실력’이라는 몰염치 앞에 분노하던 이대생이었고, 청와대 앞길을 가로막은 차벽 앞에서 가슴 쥐며 통곡하던 세월호 유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게 나라냐’ 외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촛불이었습니다. 이제 광화문광장에는 출퇴근길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과 자동차 헤드라이트만이 분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마다 삶 속에서 하나의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한겨레>는 지난겨울을 누구보다 따뜻하게 보낸 시민 6명을 찾아, 그들 가슴속 촛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속에 우리가 보이시는지요.

지난겨울, 찬 바람 부는 거리에서 우리 모두는 꺼지지 않는 촛불이었다. 지난 3월4일 저녁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 헌재 탄핵 인용! 박근혜 구속! 황교안 퇴진! 19차 범국민행동’ 집회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박근혜 탄핵을 염원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
지난겨울, 찬 바람 부는 거리에서 우리 모두는 꺼지지 않는 촛불이었다. 지난 3월4일 저녁 ‘박근혜 없는 3월, 그래야 봄이다! 헌재 탄핵 인용! 박근혜 구속! 황교안 퇴진! 19차 범국민행동’ 집회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려 참석자들이 박근혜 탄핵을 염원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

“세월호 진상규명 위해 내가 할 일은 하고 싶어요”
세월호 참사 생존학생 장애진씨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장애진씨.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장애진씨.

‘세월호 생존자’로 발언 두려웠지만 용기 내 무대 올라
“헬기·해경 왔다기에 기다렸지만 결국 우리 스스로 탈출”
당장 바뀌지 않더라도 꾸준히 진실 되찾길
세월호 경험에 ‘응급구조사’로 장래희망 바뀌어

‘세월호 생존자’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대 위에 올라가는 게 두려웠어요. 한명이 대표해서 글을 읽어야 하는데 친구들은 다 직접 못 읽겠다고 하는 거예요. 어쩐지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대표해서 읽은 거예요.

“저희는 모두 구조된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저희 스스로 탈출했다고 생각합니다. 구하러 온다 해서 정말 구하러 와줄 줄 알았습니다. 헬기가 왔다기에, 해경이 왔다기에 역시 별일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지금,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할 수 없게 됐고 앞으로 평생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아마도 저희가 잘못한 게 있으면 그것은 세월호에서 살아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월, 세월호 1000일을 맞아 무대에 올라간 거 후회 안 해요. 거기서 말하고 난 뒤 더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 전에도 촛불집회에 한번 참석했었는데 세월호와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도 방송차에 올라타 “미안하다”고 발언하는 걸 봤어요. 그런 사람들을 볼수록 진상규명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위로해줘도 그 전엔 인터넷으로 보거나 들어서 실감이 잘 안 났어요. 무대 위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보니 ‘아직도 기억해주시는구나’ 직접 보는 거잖아요. 촛불로 많은 위안을 얻었어요.

이후에 건너서 아는 사람이 부탁해와서 세월호 관련 인터뷰를 했고 그게 많이 알려졌는데, 에스엔에스(SNS)로 몇백명씩 친구 추가 신청을 보내왔어요. 페이스북 메시지도 많이 왔고요. 너무 많이 와서 잠을 못 잘 정도였어요. 힘내라고 응원을 하거나, 잊지 않겠다고 하는 식으로요. 가끔 미안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러실 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잊지 않겠다”고 해주시는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촛불 이후에 미수습자 수색도 이뤄졌고, 선생님 순직도 인정되고 하나하나 풀리고 있지만 한번에 모든 게 바뀐다고 보진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를 기억해주셔서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아빠는 이 사건이 해결되려면 오래 걸릴 거라고 했어요. 당장 바뀌지 않더라도 계속 알리고 진상규명을 해야 한다고. 조금씩 변화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제 전공은 응급구조과예요. 전공 선택에 세월호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원래는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었거든요. 사실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닌데, 응급구조사가 되려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3학년이 되면 국가고시를 봐서 자격증을 따고 응급구조사가 되려고 해요. 맡은 일을 다하는, 사람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는 그런 응급구조사요.

“촛불이 저희 동네로 왔죠. 할 수 있는 일로 같이 했을 뿐이에요”
통인동 커피공방 박철우 대표

통인동 커피공방 박철우씨.
통인동 커피공방 박철우씨.

통인통 평화행진에 따뜻한 보리차에 펼침막으로 응원
노숙농성하던 세월호 유가족이 개선장군처럼 보여
마을을 찾은 촛불 대접하려 카페 일상도 집회에 맞춰
이웃들도 “동네가 인심은 잃지 않은 것 같아 다행”

저는 촛불집회에 참여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제가 집회에 가는 게 아니라 집회가 저희한테 왔었죠. 시민들은 영하의 추위에도 행진에 나섰고, 저는 우리 동네(통인동)를 찾은 시민들께 따뜻한 차를 대접하고 카페 화장실을 개방했어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하고 싶었어요. 제 ‘홈그라운드’가 여기였다는게 다른 점일 뿐이었죠.

촛불집회 초반에는 동네분들과 고민도 좀 했습니다. 차벽을 넘어 여기까지 오게 되면 시위가 격렬해질 텐데 어떡한다, 가게에 피해가 미치진 않을까.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고민이었죠. 그런데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법원에서 청와대까지 행진을 허가하면서 3차 촛불집회 때부터 시민들이 이곳까지 왔습니다. 길목에 있는 저희는 따뜻한 보리차 한 모금 나누고 화장실을 개방했습니다. 사실 번거로운 일이기도 해서 4차 촛불집회부터는 화장실만 개방할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론 세월호 유가족이 선두에 선다고 해서 계속 따뜻한 차와 펼침막을 준비했어요. 이 마을에도 당신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4차 촛불집회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 100m까지 올 수 있던 첫번째 날이었습니다. 그때 저희도 펼침막을 처음으로 걸었는데 “어머님 아버님 힘내세요”라고 문구를 썼죠. 행진이 시작되고 도로가 고요해지더니 북소리가 둥둥 울리면서 멀리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유가족 중 한 아버님이 방송차 위에 타고 구호를 외치면서 오셨고요. 제가 길가에서 지켜보고 있던 중에 아버님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서로 멋쩍게 웃는데, 그게 참 감동적이었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며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노숙농성하던 분들이었잖아요. 그분들이 청와대 앞 100m까지 딱 100m 더 가까워지는데 2년4개월이 걸렸어요. 방송차로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과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더 이상 죄인 같지 않고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기분이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자하문로가 열렸다”고 표현했죠. 그 집회에 나온 사람들 서로가 감사했을 겁니다. 그 뒤론 카페의 일상이 촛불을 중심으로 돌아갔어요.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토요일 집회 뒤처리를 하고, 화요일에는 다음번 집회엔 뭘 할까 고민하고 수·목요일에는 펼침막 만들고, 금요일에는 촛불을 맞이할 준비를 했죠.

촛불집회가 끝나고 4~5월에는 썰물이 밀려간 것처럼 갑자기 확 조용해진 기분이 있었어요. 급격히 일상으로 돌아왔죠.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변화도 있었죠. 마을에 계신 보수적인 철물점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박 사장이 대체 왜 이러나 했는데, 덕분에 동네가 인심은 잃지 않은 거 같아서 다행이다. 하던 대로 하라”고.

“환호성이 들리진 않았지만 시민들 표정과 눈빛, 손짓을 봤어요”
촛불집회 자유발언에 참여한 농인 김세식씨

촛불집회 자유발언에 참여한 농아인 김세식씨.
촛불집회 자유발언에 참여한 농아인 김세식씨.

한국어가 외국어처럼 낯선 농인들
촛불집회 이전엔 박근혜 정부가 잘하는 줄 알아
자유발언 나서 작은 수화통역창 지적
노래·함성 듣진 못해도 그날의 신명 모두 느껴

흔히 ‘티브이(TV) 뉴스만 봐서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 수 없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신문도 읽고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팟캐스트도 듣는다더군요.

한국어가 외국어나 다름없는 농인에게는 신문 기사를 읽기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촛불집회에 나가기 전까지는 박근혜 정부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매주 광장에 모이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 자리에 수화통역사도 있다길래 한번 참여해봤어요. 티브이 뉴스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어찌 그리 많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이걸 도저히 혼자 볼 수가 없어서 농인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뼈가 시릴 만큼 추웠지만, 집회에서 접하는 새로운 세상이 재미있어 매주 토요일 꼬박꼬박 나갔습니다.

나는 광장에서 정치를 처음 만났습니다. 내가 몰랐던 정치인의 비리, 나의 권리 그리고 다른 소수자의 고통을 알게 됐어요. 내친김에 용기를 얻어 자유발언도 했습니다. “비장애인에겐 별거 아니지만 내게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인 수화통역창이 조금 더 커지면 좋겠다”고 말이죠.

환호성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날 응원하는 시민들의 표정과 눈빛, 손짓을 봤어요. 그동안은 장애로 차별받고 소외당한 일도 많았지만, 그 순간만큼 나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여했어요.

나는 아직도 농인 친구들과 비장애인 시민들이 다 함께 공연을 보면서 춤을 추듯 수화를 따라 하던 광장의 광경을 잊지 못합니다. 노래를 듣지 않아도 광장에 모인 우리가 모두 얼마나 흥이 올라 있었는지 나는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촛불집회는 내 일상을 바꿨습니다. 촛불 이후 시민들은 조금씩 달라졌어요. 얼마 전 한 시민에게 길을 물었더니 친절히 알려주고는 ‘감사하다’며 수화를 하는 거 있죠? 수첩에 글씨를 써서 도움을 요청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아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회의적이던 내 농인 친구들도 이제 변화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도 바꿨는데 우리가 농인의 삶을 바꾸지 못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지난 대선 기간에 방송국 앞에 모여 시위도 했습니다. 바로 대선 토론회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참가자 모두가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토론회가 상상이 되나요? 후보들의 치열한 공방을 단 1명의 수화통역사가 전달하면 농인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답니다. 나는 앞으로 내 참정권을 되찾는 데 힘을 쏟아볼 생각입니다. 미국 대통령이나 일본 총리처럼 한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장에 수화통역사와 함께 들어오는 그날을 기다리면서요. 장애를 넘고 언어를 넘어 함께 웃고 울던 촛불광장, 이제는 내 일상이 되길 바랍니다.

“묵상의 촛불이 외침의 촛불로 바뀌었어요”
임미이 광주장애인스쿨 교장

임미이 광주장애인스쿨 교장(오른쪽).
임미이 광주장애인스쿨 교장(오른쪽).

촛불집회 현장에서 거대한 에너지 체험
“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
문재인 정부 진정성에 흐뭇한 마음
장애인 현장의 열악함에 지치지 말자 다짐해

솔직히 난 그동안 불편한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4대째 기독교를 믿어온 집안 분위기 때문에 교회와 가정을 중심으로 조용히 살아왔다. ‘광주장애인스쿨’ 김동효 이사장한테서 “촛불집회에 나가자”는 제안을 받고 “그래요” 하고서도 내심 걱정이 됐다. 처음 촛불집회에 나갔을 땐 조용히 지켜보는 현장 구경꾼이었다. 구호에 맞춰 팔을 올리기도 어색했다. 두번째, 세번째 광주 금남로 촛불집회부턴 동화되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호를 외칠 때마다 주먹을 쥐고 팔을 뻗었다. 말로만 나라 걱정 하고 나쁜 것을 보면 “그러면 안 된다”고 되뇌던 내가 현장에서 힘을 보탰다.

세월호 어머니들이 무대에서 “바닷속 주검을 찾아달라”고 호소할 때 ‘엄마의 마음’으로 울었다. 중학생들이 나와 “이게 나라냐?”고 발언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신선했다.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뭉클했다. 마지막 촛불집회 땐 장구와 꽹과리를 치며 놀았던 것도 좋았다. 촛불집회 현장에 나가면서 마음이 탁 열린 것 같다. 그동안 남을 돕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헌신하는 것이 몸에 뱄지만, 모든 것이 교회 중심이었다. 이젠 사회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촛불집회를 만나기 전 나에게 촛불은 침묵의 상징이었다. 교회 촛불은 고요하고 은은한 가운데 하나님에게 묵상하는 분위기로 이끈다. 촛불 앞에서 반성하고 잘못을 조아린다. 하지만 촛불집회 때 만난 촛불은 거대한 외침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질러도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도달하는 함성이었다. 어마어마한 힘을 한꺼번에 표현하는 메시지가 촛불의 물결이었다. 촛불 하나하나는 나약하지만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되면 누구도 꺼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촛불집회 이후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촛불에 합류할 것이다. 촛불의 뜻을 받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뒤 지금까지 흐뭇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 특히 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때 문재인 대통령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보여준 행동에서 진정성을 느꼈다. 지금까진 큰 틀에선 긍정적이다. 하지만 정책들이 밑으로 내려오다 보면 참된 의미가 도달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장애인 정책 분야에선 정부와 자치단체가 세심하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촛불집회 때 뛰어다니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보고 남을 위해 몸을 불사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애인 현장이 열악하다고 두 손 놓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광주장애인스쿨은 20~30대 3급 발달장애인 14명이 바리스타, 도자기 빚기, 파크골프를 배우는 공동체다. 학생 중엔 바리스타로 취업했다가 비장애인들한테 상처를 받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음달엔 학생들과 협동조합을 꾸려 카페 창업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촛불집회 때 거리에서 만난 한 평화통일운동단체에 매달 1만원씩 기부하고 있다. 광주장애인스쿨 직원 2명도 매달 5천원씩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흐뭇한 변화다.

“눈앞의 욕심보다 모두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게 됐어요”
‘밀양 할매’ 정임출씨

‘밀양 할매’ 정인출씨.
‘밀양 할매’ 정인출씨.

흙 밟으러 이주한 밀양에 거대 ‘송전탑’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덩실 어깨춤 췄지만
신고리 5·6호기 건설 소식에 눈물만
촛불집회 뒤 “내 이익보다 모두의 미래 고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마을에 사는 ‘밀양 할매’ 정임출(76).

늙어서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흙 밟으며 살고 싶어, 2004년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 밀양 위양마을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2005년이 되니까 마을에 송전탑이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그냥 송전탑이 아니고, 지금까지 우리가 한번도 본 적 없는 큰 송전탑이.

이미 송전탑이 들어선 지역에 견학을 가봤는데, 한결같이 사람이 살 수 없는 동네가 됐더군요. 그래서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에 참여하게 됐고, 지난겨울 촛불집회에도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했죠.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도 두번 갔는데, 광화문 집회에는 박근혜를 탄핵하려고 갔고, 밀양 촛불집회에는 원전을 없애고 송전탑을 철거하기 위해 갔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너무너무 좋아서 춤을 췄어요. 탈원전 정책을 공약으로 낸 후보였으니까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고 눈물이 나서 말을 하지 못하겠네요.

그런데 신고리 5·6호기를 다시 건설한다니. 문재인 대통령을 그렇게 믿었는데, 믿었던 만큼 실망도 너무너무 커요. 신고리 5·6호기 건설이 결정됐을 때 청와대 앞에 가서 통곡을 했어요. 차라리 나를 죽여서 원전 밑에 묻으라고.

정말 답답하고 원통해요. 앞으로 탈원전 정책을 펴겠다고 대통령이 약속했지만, 정권이 바뀌면 그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지금 원전이 터져서 죽어도 전혀 겁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해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나자 일본 바다에서 잡은 고등어나 명태도 위험하다며 먹지 말라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 땅에 원전을 건설하는 것을 찬성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추운 겨울에 촛불집회에 가려니까, 누가 그러더군요. “나라에서 하는 일이고 대통령이 하는 일인데, 니들이 백날 그렇게 떠들어봐라. 하나라도 바뀌는 게 있는가.”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우리가 다 같이 떠들면 바꿀 수 있는 일도, 너처럼 뒤로 빠질 구멍만 찾는 사람들 때문에 바꾸지 못한다”고.

정부와 한전이 돈으로 아무리 유혹해도, 밀양주민 모두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송전탑 건설을 반대했다면 송전탑은 결코 세워지지 않았을 거예요. 원전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 문제를 핑계로 원전 건설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결코 원전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후손들에게 욕먹을 짓은 하지 않아야죠.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해도.

촛불집회에 참가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요. 당장 눈앞의 내 욕심보다 우리 모두의 미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또 우리 모두가 마음을 모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촛불시민의 냉소와 외면 기억해 공영방송 살리겠다”
대전MBC 보도국 막내 조명아 기자

대전엠비시(MBC) 보도국 막내 조명아 기자.
대전엠비시(MBC) 보도국 막내 조명아 기자.

지난해 겨울 시민들 손가락질 잊지 못해
내가 만든 뉴스가 사회에 해악만 끼쳐
“내가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자괴감
촛불시민이 주신 소중한 기회, 파업 투쟁마다 떠올려

“엠비시(문화방송)는 나가라!”

지난겨울 촛불 든 한 시민의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엠비시가 감히 무슨 낯으로 여기 왔느냐는 분노가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 틈으로 일렁였다. 촛불혁명의 한복판에서 엠비시 기자인 나는 외면당했다. 촛불시민들은 우리에게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다. 보수단체의 태극기 집회에선 엠비시를 반겼다. 카메라와 함께 지나가면 “파이팅”이라며 우리를 응원했다. 엠비시만 본다는 태극기 집회의 환호성 앞에 만감이 교차했다. 비참했다.

그 시기 대전엠비시 노동조합 안에서 “우리가 먼저 시민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매주 토요일 대전과 서울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기자가 아닌 노조원으로서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섰다. 내가 만든 뉴스가 사회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악을 끼치는 상황을 경험하며 ‘내가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괴로웠다.

내가 쓴 촛불집회 예고 기사를 보도국장이 직권으로 ‘날려버린’ 일도 있었다. 매번 하는 촛불집회를 굳이 주말 기사로 쓸 필요가 있느냐는 이유였다. ‘데스킹’(보도국 내 의사결정) 과정을 모두 무시한 일방적인 처사였다. 갑을오토텍 노조 파괴, 대덕특구 내 비정규직 문제, 세월호 관련 취재 등 여러 발제가 보도국장 앞에서 ‘킬’ 당했다. 아침마다 국장은 우리의 취재계획을 이진숙 사장에게 보고했다. 이 모든 일에 분노했지만 제대로 따지진 못했다.

당시 보도국에는 ‘똥이 더러워 피하지 무서워 피하냐’는 식의 분위기가 팽배했다. 어차피 엄혹한 시절이니 조금 참자는 말이었다. 그런 선배들의 태도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점차 선후배 사이 대화는 사라졌고, 대전엠비시 보도국은 마치 독서실처럼 무거운 침묵만 가득했다. 우리는 무기력했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탄핵 결정을 내린 지난 3월10일, 시민들이 박근혜 구속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탄핵 결정을 내린 지난 3월10일, 시민들이 박근혜 구속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16년 11월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4차 촛불집회 현장. ‘얼룩말 연구회’라는 이름의 펼침막을 든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016년 11월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4차 촛불집회 현장. ‘얼룩말 연구회’라는 이름의 펼침막을 든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016년 11월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박근혜 퇴진 부적’을 등에 붙이고 나온 한 시민의 모습.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2016년 11월12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박근혜 퇴진 부적’을 등에 붙이고 나온 한 시민의 모습.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2016년 11월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2016년 11월12일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촛불집회는 엠비시에 기회를 줬다. 거리의 시민들은 우리에게 공영방송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대상은 정권도 아니고, 정권 밑에 있는 낙하산 사장과 사장에 부역하는 보직 간부들도 아니었다. 촛불집회는 진짜 두려운 대상이 시민이란 사실을 증명했다.

촛불혁명이 없었다면 엠비시, 케이비에스(한국방송) 파업은 불가능했다. 파업 투쟁을 하면서 그 사실을 늘 떠올린다. 광주민주화항쟁 때 제대로 방송하지 않은 광주엠비시의 건물이 시민 손에 불탔다. 그 뒤 광주엠비시는 어떤 권력의 탄압에도 시민 편에 서는 것을 지표로 삼는다고 한다.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에게 손가락질당한 아픈 기억은 엠비시가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소중한 기준이 될 것이다. 선배들이 그 기억을 잊는다면 막내로서 쓴소리도 서슴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 다시 기회를 준 촛불시민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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