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분석] 문 대통령 대북정책 시동
적대행위 중단·이산상봉 협의
‘베를린 구상’ 11일 만에 후속조처
북핵 해결과 관계 복원 동시추진 의지
적대행위 중단·이산상봉 협의
‘베를린 구상’ 11일 만에 후속조처
북핵 해결과 관계 복원 동시추진 의지
문재인 정부가 17일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 중단을 위한 군사당국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위한 적십자회담을 북한 쪽에 동시 제안했다. 정부는 특히 그동안 문 대통령이 남북 대화의 전제로 제시했던 ‘북한의 도발 중단과 비핵화 의지 표현’, ‘올바른 여건’ 등 조건 제시 없이 북한에 대화를 제안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6일 독일에서 대북정책의 청사진으로 제시한 ‘베를린 구상’ 발표 11일 만에 나온 후속 조처로, 한반도 평화와 긴장 완화를 위해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복원을 동시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날 정부는 대북제안 발표의 형식까지 세밀하게 신경썼다. 서주석 국방부 차관은 이날 오전 9시 ‘군사분계선에서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를 위한 남북군사당국회담 개최 제의’라는 발표문을 통해, 오는 21일 판문점 북쪽 지역 ‘통일각’에서 남북군사당국회담을 개최할 것을 북쪽에 제안했다. 같은 시각 김선향 대한적십자사(한적) 회장 직무대행도 10·4 정상선언 10주년이자 추석인 오는 10월4일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성묘 방문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8월1일 판문점 우리 쪽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이어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오전 11시께 기자회견을 열어 ‘베를린 구상 후속조치 관련 발표문’을 내놓고, “한반도 평화와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 간 대화와 협력은 북핵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의 상호 선순환적 진전을 촉진해 나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회담의 직접 당사자인 국방부와 한적의 최고위급 책임자가 각각 발표한 내용을, 남북관계의 주무부처인 통일부 장관이 종합해 공식화한 셈이다. 조 장관은 특히 문 대통령이 ‘베를린 구상’에서 밝힌 △대북 적대시 정책 △북한 붕괴 △흡수 통일 등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란 원칙을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쪽에 대해 최대한 공식적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발표 형식을 세심하게 고려했다”고 말했다.
그간 북한은 남북 간 긴장 완화를 위한 군사회담 개최를 여러차례 주장해왔다. 인도주의적 차원의 이산가족 상봉행사 개최는 우리 쪽이 강하게 요구해왔다. 두 회담을 각각 판문점 북쪽 지역(군사회담)과 남쪽 지역(적십자회담)에서 열자고 제안한 것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 셈이다. 북이 원하는 군사회담과 남이 원하는 적십자회담이란 두 축을 동시·병행 추진해 9년여 꽉 막혔던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뜻이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북이 강조해온 군사회담을 앞세운 것은 긴장 완화가 우선이란 점을 북에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며 “군사회담 뒤에 적십자회담을 놓은 것은 회담 성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지난해 2월 개성공단이 가동 중단된 이후 남북을 잇는 통신선은 모두 끊긴 상태다. 이후 동해상에서 표류하다 남쪽으로 넘어온 북쪽 어민을 송환할 때마다 정부가 판문점에서 휴대용 확성기로 북쪽에 통보하는 건, 대화가 끊긴 남북관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부가 이날 대화를 제안하면서 군사회담은 서해 군통신선을, 적십자 회담은 판문점 연락사무소 채널을 통해 회신해달라고 북쪽에 요청한 것은 이번 기회에 남북 통신선을 복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문 대통령은 그간 “북한이 도발을 멈추고 비핵화 의지를 보여준다면”(베를린 구상)이라거나, “올바른 여건이 갖춰진다면”(한-미 정상회담) 등을 남북대화의 전제로 밝혀왔다. 조명균 장관의 이날 발표문에도 “북한이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면”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하지만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 제안에는 이런 전제가 붙지 않았다. 조 장관은 “올바른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는 건 북핵·미사일 도발과 관련된 기본 입장”이라며 “그럼에도 (회담) 제안을 한 것은 한반도 평화와 긴장완화, 이산가족 문제 등 시급한 문제 해결을 위한 초기적 단계의 남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조치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은 “그간 등장한 ‘적절한 조건’이나 ‘올바른 여건’이란 말은 북핵 문제가 심각해진 상황에서 신중하게 접근하기 위해 내놓은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이어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남북대화가 결실을 맺는다면, 바로 그런 ‘조건’과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라며 “그렇게 분위기가 조성되면, 남북관계를 훨씬 더 근본적이고 전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화를 하겠다는 게 문 대통령의 뜻”이라고 짚었다.
취임 불과 두달여 만에 문 대통령이 대북정책에 본격 시동을 걸면서, 전문가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는 또 다른 ‘문재인식 해법’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북은 기본적인 대화채널조차 끊긴 채다. 북핵·미사일 위협은 깊어졌고,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제재 공조도 강화됐다. 남북대화가 9년여 공백기를 보내는 새, 북의 지도자도 바뀌어 있다. 기존 남북관계의 틀만으론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얘기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는 “남도 북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고 불신만 깊다. 회담 초기엔 당연히 원칙을 강조하며 상대편의 의지를 묻게 될 것”이라며 “하지만 신뢰라는 건 대화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대화를 시작하고,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없는 신뢰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 고비도 있을 것이고, 차이도 클 것이며, 여러가지 환경에 따른 악재도 있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최소한 군사회담과 적십자회담 두 채널은 계속 열어놓고, 서두르지 말고 긴 호흡으로 남북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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