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박성민의 2017오디세이아
(9) 문재인과 천정배
(9) 문재인과 천정배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협력보다 갈등이 더 길었던
김대중과 노무현의 역사
현재 문재인과 천정배가
그 실존적 관계를 재연한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 포용했는가
노무현은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1992년 김대중을 위해 뛰었다
그 헌신의 정치력을 배워야 한다 호남은 문재인에게 부채의식 없다 ‘보수는 하나만 같으면 동지로 보고, 진보는 하나만 다르면 적으로 본다’더니 새누리당은 싸우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하나가 되는데, 지금 야당은 천정배는 ‘김대중’, 문재인은 ‘노무현’의 적자를 자처하면서 분열로 치닫고 있다. 새누리당은 이익을 위해 ‘동업’이라도 하는데, 새정치민주연합은 ‘동지’의 결사는 턱도 없고, 딴살림 차릴 기회만 엿보는 ‘동거’ 수준일 뿐이다. 당명에 ‘통합’과 ‘연합’을 쓰는 것은 그것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두 전직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이들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노무현은 천정배의 승리를 ‘원칙 없는 승리’라고 분노했을 것이다. 그는 또 정동영의 패배 역시 ‘원칙 없는 패배’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노무현은 ‘원칙 있는 승리’가 가장 좋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원칙 있는 패배’가 ‘원칙 없는 승리’보다는 낫다고 봤으며, ‘원칙 없는 패배’는 경멸했다. 그는 정당도 ‘명분은 있었으나, 실패한 정당’, ‘명분도 있었고, 성공한 정당’, ‘명분은 없었으나, 성공한 정당’, ‘명분도 없었고, 실패한 정당’으로 나눠서 평가했다. 예컨대 그는 ‘명분도 있었고, 성공한 정당’의 사례로 1985년 ‘신민당’, 1987년 ‘통일민주당’, 그리고 2003년 ‘열린우리당’을 들었으나, 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좋게 봐도 ‘명분은 있었으나, 실패한 정당’이거나 혹독하게 본다면 ‘명분도 없었고, 실패한 정당’의 예에 더 가깝다. 노무현은 ‘명분은 있었으나, 실패한 정당’의 사례로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한 정치인들이 만든 ‘민주당’을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명분은 없었으나, 성공한 정당’의 사례로 1995년의 ‘새정치국민회의’를 들었다. 아마도 이 정당으로 1997년 정권교체에 성공하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했을 것이다. 나는 1987년의 ‘평화민주당’,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2003년 ‘열린우리당’ 모두 ‘명분도 없었고, 실패한 정당’으로 평가한다. 그는 ‘명분도 없었고, 실패한 정당’의 사례로 1997년 이인제의 ‘국민신당’을 예로 들었다. 그는 정치에서 ‘명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노무현은 야당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바람에 ‘명분은 없었으나, 성공한 정당’의 가장 강력한 사례가 1990년의 ‘민주자유당’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에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도 강력하게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강력한 적을 앞두고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둔 야권이 사분오열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더라도 ‘호남신당’을 강하게 비판했을 것이다. 과거 야당을 이끌었던 김대중·김영삼은 ‘서울’ 승부를 포기한 적이 없다. 삼국시대 이래로 ‘한강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역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두 사람 다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천정배가 광주로 내려가 호남신당을 계획한다면 ‘호남 자민련’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호남신당’은 명분도 없고, 실패할 가능성도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 민심이 천정배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호남 민심이 ‘문재인’과 ‘새정치민주연합’에 화가 나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광주가 대놓고 ‘지역주의’를 선동한 정치인에게 압도적 승리를 안겨준 데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공천, 후보, 전략, 공약, 메시지, 조직, 홍보도 패배의 이유겠지만 표 차이를 고려한다면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다. 순천과 광주에서 연거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를 거부한 것은 문재인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다. 왜 그랬을까? 호남이 ‘정치적 상수’에서 ‘정치적 변수’로 전락했다는 것, 내놓을 만한 ‘대선 후보가 없다’는 것도 상실감을 키웠을 것이다. 호남이 대주주인 당에서 부산 출신의 문재인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도 솔직히 불편했을 것이다. 문재인은 2006년 부산을 방문해서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왜 부산시민들이 ‘부산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함으로써 호남인들의 분노를 샀다. 문제는 노무현도 2002년에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직후 지방선거를 앞두고 비슷한 발언을 한 적이 있지만 문재인처럼 오래 기억되지 않는 것은 호남 사람들이 노무현과 문재인을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호남인들이 문재인에게는 ‘부채의식’이 없다. 실제로 3당 합당을 거부한 노무현은 1992년 대선과 1997년 대선을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뛰었다. 1997년 티브이 토론 방송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화면에 잡힐 때, 인기 많은 영남 사람인 노무현이 같이 잡히도록 앉아주기까지 했다. 2002년 민주당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은 1997년 디제이의 사진이 크게 들어가 있는 홍보물을 들고 올라가 흔들면서 “내가 이 사진 들고 부산 자갈치시장 돌면서 김대중 찍어달라고 했다”는 특유의 선동적 연설로 호남인들의 ‘부채의식’을 자극했다. 그런 눈으로 봐서 그런지 노무현에 대해서는 “노무현의 뿌리가 호남이래”라는 루머가 돈 반면 문재인에 대해서는 호남과 관련한 부정적인 유언비어가 돌았다. 천정배나 정동영에 대한 호남인들의 애틋한 감정도 있을 것이다. 잘못한 자식이라도 남이 야단치면 괜히 기분 나쁜 거 있잖은가. 지난 대선에서 호남이 그렇게 압도적으로 지지해 줬는데 ‘힘있는’ 문재인이 ‘힘없는’ 천정배에게 왜 그리 모욕을 주느냐는 분노도 들어 있을 것이다. 노무현은 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는가 새정치민주연합이 분열을 극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하려면 문재인은 ‘김대중’에게 배워야 하고, 천정배는 ‘노무현’에게 배워야 한다. 유력한 대권후보였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비주류를 감싸 안았고 특히 영남 인사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문재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길은 ‘문재인만 빼고는’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 김영삼, 김대중, 이회창이 연속으로 대선에 출마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이 속한 정당의 지지기반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으로 밀어붙여도 됐지만 문재인은 그럴 힘이 없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문재인은 후보가 되기도 어렵지만 설사 된다고 해도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디제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포용했는가를 배워야 한다. 이회창은 이인제, 김종필, 정몽준을 감싸 안지 못해 결국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반면 노무현은 탄탄대로가 보장된 3당 합당을 거부하고 1992년 김대중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1997년에는 ‘통추’ 멤버 대부분이 ‘3김 지역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한나라당으로 갔지만, 노무현은 ‘투항’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자괴감을 느꼈지만 ‘50년 만의 정권교체’라는 대의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천정배도 야권 지지자들이 그토록 원하는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서는 노무현의 ‘명분의 정치’를 배워야 한다. 문재인과 천정배가 진정으로 김대중과 노무현을 닮으려고 한다면 애증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에게 보인 ‘헌신’의 정치력을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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