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정치 정치일반

자유로부터의 도피, 노예의 길

등록 2015-11-20 19:17수정 2015-11-22 08:44

[토요판] 박성민의 2017오디세이아
(21) 2015 대한민국의 공포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요즘 들어 부쩍 1990년대가 그립다. 티브이 드라마 <응답하라 1994>가 그려낸 자유분방한 개성의 시대가 그립고, <응답하라 1988>이 담고 있는 자유의 공기가 너무 그립다. 억압과 가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중산층의 삶을 향한 꿈이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지만 아주 짧았던 자유의 시대였다. 2015년 대한민국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1941년에 놀라운 통찰을 담은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발표했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했던 독일인들이 혁명으로 세운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년)을 붕괴시키고 나치를 지지함으로써 애써 얻은 ‘자유’를 버리고 스스로 ‘복종’을 선택했던 불가사의를 잘 분석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개인이 자유의 짐으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의존과 종속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존재라는 것을 갈파했다. 고독으로부터의 피난소로 종교를 선택하거나, 독재자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정신적 안정을 찾거나, 자본주의의 기계에서 톱니바퀴가 되어 버린 개인은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고독과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는 것이다. 나치와 같은 파시즘의 정치체제는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복종’(마조히즘)과 더불어 힘이 없는 자들에 대한 ‘강압적 지배’(사디즘)의 충동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통찰했다. 2015년 대한민국도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프라이버시 잠식하는 시큐리티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를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한다. 야당과 진보진영은 박근혜 정권이 정치적 반대자들을 ‘종북으로 몰고 있다’ ‘공안 통치를 한다’ ‘매카시즘이다’라고 비판하는데,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매카시즘’으로부터 야권이 놓치면 안 될 중요한 교훈은 매카시의 선동이 미국인들에게 먹혔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매카시즘은 1950년 2월 “국무부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 상원의원의 폭탄 발언으로 시작되어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반공산주의’ 광풍이다.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 나잇 앤 굿 럭>은 광기의 시대를 잘 보여준 영화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매카시에 맞서지 못할 때, <시비에스>(CBS)의 프로듀서인 프레드 프렌들리와 앵커 에드워드 머로는 자신들이 진행하는 ‘시 잇 나우’(See It Now)라는 뉴스 다큐멘터리를 통해 용감하게 매카시에 맞선다. 이 프로그램의 클로징 멘트가 “굿 나잇 앤 굿 럭”이다. 밤새 안녕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1940년대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민족주의 독일, 군국주의 일본에 맞서 두 개의 큰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실제로 더 두려워한 적은 혁명 이론으로 무장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스탈린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1945년 8월9일 한반도에 ‘38선’을 급하게 그었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은 공산화가 되었다. 공산주의의 영토는 확장되었고, 사회주의에 매료된 지식인들은 많아졌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두려움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매카시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1957년 10월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린다. 1961년 4월에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소련의 과학기술 수준과 핵전쟁의 공포가 미국 전체를 두려움에 빠뜨렸다.

핵전쟁의 공포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 자부하는 미국의 자유와 인권을 유보시켰다. 민주주의의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스파이 브릿지>는 1957년 체포된 소련 스파이에 대한 재판을 다룬 영화다. 그 당시 미국인들의 소련에 대한 공포심과 적개심을 고려할 때 ‘빨갱이’를 변론하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이었는가를 영화는 잘 보여준다. 공포는 자유를 도피시킨다. 1950년대였기 때문일까?

2013년 12월 미 워싱턴 지방법원은 휴대전화 내역 감청 등 일반인에 대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대량 정보 수집은 위법이라며 시민단체 ‘프리덤 워치’의 설립자 래리 클레이먼 등이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리처드 리언 판사는 “사실상 시민의 개인정보에 대한 이같이 조직적이고 최첨단식인 수집과 보유보다 무분별하고 독단적인 침해는 상상할 수 없다. … 미국 헌법을 만든 건국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조차 시민의 사생활 권리에 대한 이같은 정부의 ‘전체주의적인’ 위법활동에 경악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미국은 지난 10여년간 공항에 ‘알몸 투시’ 전신 스캐너까지 설치했던 나라다.

프라이버시와 시큐리티 사이의 균형은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할 때마다 시큐리티 강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2010년 1월에 <유에스에이(USA) 투데이>와 갤럽의 조사에서 78%가 전신 스캐너 사용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한다는 응답은 20%에 그쳤다. ‘9·11’과 같은 테러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결과였다.

공포 앞에 장사 없다. 메르스로 수십명이 죽으면 온 국민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사생활 보호보다는 격리 조치를 우선하게 된다. 비행기 테러를 몇 번 목격하면 비행기 타기가 두려워진다. 당연히 자유와 인권보다는 보안 강화에 동의하게 된다. 60대 이상의 유권자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는 북한과 종북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 때문일 것이다.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못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 이석기 의원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등을 거치면서 콘크리트 지지로 굳어졌다.

공포는 정치에서 여전히 유효한 프로파간다 수단이다. 북한과 종북좌파는 ‘눈에 보이는 적’이므로 국정교과서 국면에서도 유력한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야당의 친일·독재는 공포를 조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다. 만약 아직까지 군인 출신의 독재자가 대통령이라면 독재 타도의 ‘민주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했을 것이다. 김영삼·김대중이 이끌던 ‘정치적 자유주의’ 세력이 눈에 보이는 적이 사라지면서 몰락하자 민주의 시대도 저물었다.

그토록 자유 갈망한 독일인들은
왜 ‘바이마르공화국’ 버리고
나치 지지하며 복종 선택했나
왜 미국의 매카시 선동은 먹혔나
두려움과 공포의 유령이 떠돈다

자유 버리고 1970년대로 도피한
2015년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정치·자유·개혁의 시대였던
1990년대가 그리워졌다
응답하라 1990년대!

  

전쟁은 사유화됐다

조지프 나이는 <권력의 미래>에서 지금은 ‘전쟁이 사유화’되었다고 통찰했다. 국가 간의 전면전이 아닌 이슬람국가(IS)나 알카에다 같은 비국가적 행위자(테러집단)에 의한 전쟁을 ‘사유화한 전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전쟁만 사유화된 것이 아니다. 권력도 시장도 사유화(독점)되고 있다. 슬라보이 지제크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이혼하려고 한다”고 일갈하면서 민주적으로 인준받지 않은 ‘테크노크라트’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자본주의 현실을 고발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돈으로 사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2015년 대한민국은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자유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혹독하게 비판한 대로) <노예의 길>로 가고 있다.

내가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주 짧았지만) 그 시대가 정치의 시대, 자유의 시대, 개혁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결핍이 가치를 알게 한다. 병든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가난한 사람이 돈의 가치를 더 잘 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게 세상의 이치다. 2015년 대한민국의 정치의 결핍, 자유의 결핍, 개혁의 결핍이 1990년대를 그리워하게 한다.

1980년대까지는 (정치적) 자유주의자인 김영삼, 김대중이 진보주의와 손잡고 보수주의에 저항한 시대였다. 1990년대는 와이에스(YS)와 디제이(DJ)가 3당 합당과 디제이피(DJP)연대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연합체를 만들었다. 정치적 자유주의자인 김영삼과 김대중이 패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자유주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보수 세력에게 완전히 투항했기 때문에 개혁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저 ‘응답하라 1970년대’ 세력과 ‘응답하라 1980년대’ 세력이 곳곳에서 퇴행적 충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통치의 시대, 억압의 시대, 수구의 시대다.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고, 낡음이 새로움을 이긴다. 분열이 통합을 가로막고, 기득권이 혁신을 조롱한다.

오늘 대한민국은 분노의 주체는 광장으로 나오기 때문에 잘 보이지만 분노의 대상은 꼭꼭 숨어 잘 보이지 않는다. ‘군인의 시대’였던 1980년대는 분노의 대상이 분명했다. 가장 힘이 센 사람과 가장 자주 보는 사람과 가장 분노해야 할 사람이 같았으니까. 반독재 투쟁이 쉬웠던(?) 이유다. 전선에서 이탈해 포섭되는 순간 ‘어용’ 교수가 되고 ‘사쿠라’ 야당이 되었다. 무소불위의 군인들 앞에 모두가 숨을 죽이던 시대였다. 이때 대한민국을 이끌던 파워그룹은 군인, 관료, 재벌의 순서였고 정치인은 끝자리에 겨우 자리잡았다.

1990년대는 ‘정치인의 시대’였다. 1993년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지난 30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던 군인들은 전두환의 연희동 골목에서의 저항(?)을 끝으로 순식간에 몰락했다. 패권을 차지한 것은 3김을 필두로 한 정치인이었다. 그 뒤를 이어 관료들과 재벌들은 영향력을 더 확대했고, 그리고 남은 한 자리는 ‘언론’이 차지했다. 1990년대가 정치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네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들이 당을 이끌었다, 둘째, 4개 이상의 정당이 경쟁했다, 셋째, 풍부한 정치자금이 공급되었다, 넷째, 지지자들과 강력하게 조직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지도자, 경쟁 체제, 돈, 조직을 모두 잃자 정치의 시대는 끝났다.

 

반독재 투쟁보다 어려운 반독점 투쟁

2000년대 이후의 패권은 논란이 있다. 나는 관료가 패권을 차지했다고 보지만 어떤 이들은 재벌이라고 단언한다. 어쨌든 정치가 몰락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세력 판도는 외환위기 이후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파워그룹의 신질서가 만들어낸 것이다. 관료와 재벌이 패권을 원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어쨌든 정치가 힘을 잃자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가 열렸다. 2000년대 들어 파워그룹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법원, 헌법재판소, 검찰, 그리고 로펌을 포괄하는 ‘법조’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최고, 최후의 판단자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믿고 있다. 2015년 대한민국의 패권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선출된 권력인 정치는 다시 밀려났다.

반독재 투쟁보다 반독점 투쟁이 훨씬 어렵다. 가장 힘이 센 자와 가장 자주 보는 자와 가장 분노해야 할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적이 안 보이는 시대다. 반독재 시대가 칼싸움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적이 누구인지, 어디서 공격하는지 알 수 없는 ‘테러의 시대’요 ‘드론의 시대’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모든 엘리트들이 다 포섭되었기 때문에 ‘어용’도 없고 ‘사쿠라’도 없다.

1990년대가 ‘개혁의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개혁의제를 선도했던 ‘시민단체’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2000년 총선에서의 ‘낙천·낙선 운동’ 이후 시민단체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만일 대한민국이 운이 좋았다면 시민단체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을 뛰어넘어 한국 사회에 사상적·전략적·정책적 자양분을 공급해줄 ‘싱크탱크’로의 전환이 활발히 이루어졌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전환에 실패했다. 대한민국은 전략적으로 개혁의제를 선도할 ‘지적 네트워크’가 경제 규모에 비해 굉장히 취약하다.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공공성이 결여된 이기적인 사회가 되고 말았다.

자유를 버리고 1970년대로 도피한 2015년의 대한민국을 보면서 정치, 자유, 개혁의 시대였던 1990년대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응답하라 1990년대!

※ 이 글의 뒷부분은 지난 1월24일치에 실린 ‘적이 안 보인다,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편을 재인용했습니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정치 많이 보는 기사

[속보] 민주, 9일 내란 특검법 재발의…‘제3자’에 특검 추천권 1.

[속보] 민주, 9일 내란 특검법 재발의…‘제3자’에 특검 추천권

2표 부족…‘내란 특검법’ 재표결서 부결·폐기 2.

2표 부족…‘내란 특검법’ 재표결서 부결·폐기

쌍특검 찬성 김상욱, 권성동 겁박에 “마녀 사냥…탈당 안 해” 3.

쌍특검 찬성 김상욱, 권성동 겁박에 “마녀 사냥…탈당 안 해”

[단독] 권성동, 김상욱에 “쌍특검 찬성할 거면 탈당해” 압박 4.

[단독] 권성동, 김상욱에 “쌍특검 찬성할 거면 탈당해” 압박

‘김건희 특검법’ 국회 재표결 부결…국힘 찬성 4표뿐 5.

‘김건희 특검법’ 국회 재표결 부결…국힘 찬성 4표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