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이 13일 국회 도서관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강창광 선임기자
2003년 10월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에 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철폐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을 힘주어 말했다. 이후 20년, 선거제 개혁을 둘러싼 시도는 무수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참여정부의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20대 국회의 사무총장으로 지난 20년 선거제도 개혁의 최전선에 섰던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그럼에도 “지금, 어느 때보다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말했다.
새해 들어 윤석열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걸 신호탄으로, 선거제 개혁을 위한 정치권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유 전 사무총장은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한겨레>와 만나 “자기 동네 예산이나 더 따서 재선하려고 하는 모습의 정치권을 언제까지 방치할 거냐”며 “임기 초반의 보수 대통령이 나서고 민주당이 정치개혁을 결의한 지금, 정치권이 개혁의 최소공배수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24일 정리한 유 전 사무총장과의 일문일답.
-윤석열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언급하며 선거제 개혁 논의에 불이 붙었다. 가능성이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전부터 중대선거구제를 선호한다고 얘기해왔다. 정치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사람이라 평소 정치권을 보면서 소선거구제가 국민을 더 분열시키고 진영 간 대립을 격화시킨다는 인상을 받은 것 같다. 임기 말이면 그 효과가 반감됐을 텐데 대통령 임기 초에, 당 장악력도 상당히 강한 양반이 선거제 얘기를 꺼낸 터라 ‘상당히 잘 되겠구나’라는 기대가 생긴다. 다른 거 다 못해도 윤 대통령이 선거제 개혁만 해내면 6공화국 최대 업적이 될 거다.”
-청와대에서, 당에서, 국회에서 선거제 개혁에 앞장서왔다. 왜 그토록 절실한가.
“소선거구제가 우리에게 낯익은 제도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중심제에 소선거구제를 합쳐놓은 6공화국 36년의 결과로 정치는 실종됐고 국민은 완전히 분열됐다. 서로 다른 공화국의 국민이라고 봐야 할 정도다. 국회의원을 바꿔가지곤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나라처럼 국회의원이 많이 교체되는 나라가 없다. 선거 때마다 거의 절반이 물갈이되지만 생각해 보시라. 처음에 신인이라고 국회에 들어올 땐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사람, 평판이 좋았던 사람들인데, 4년 지나면 다 똑같은 놈이 돼버린다.
국회의원이 하는 짓이라고는 자기 동네 예산 한 줄 넣기, 예산철 되면 그게 재선의 지름길이다. 기후위기 문제나 저출산·고령화 이런 큰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하고 숙의하는 모습을 국회에서 어떻게 기대할 수가 있겠나. 그저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적폐청산에 들어가고, 그래서 국민을 더 분열시키고…. 그러다가 연말 되면 자기 동네 예산이나 더 따서 재선하려고 하는 모습의 정치권을 언제까지 더 방치할 건가.”
-임기 초반의 대통령이 나섰다 해도 선거제 개혁에서 중요한 건 국회의 의지가 아닌가.
“진영으로 굳이 갈라서 보면, 6공화국 이래 주로 보수 쪽에서는 분권형 개헌에 관심이 많고 선거제에 대해선 현상 유지 입장이 강했다. 늘 이기니까. 그런데 최근 선거에서 몇 차례 진 뒤 전처럼 완고하지는 않다. 21대 총선에서 8%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민주당이 180석, 국민의힘이 103석을 가져가지 않았나. 선거제 개혁에 앞장서온 민주당은 이미 이재명 대표가 대선 후보이던 시절 정치개혁을 하겠다고 했고 지난해 8월 전당대회에서도 정치교체를 하겠다고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그러니 민주당에서도 선거제 개혁에 다른 말이 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어느 때보다 좋은 기회를 맞았다고 보는 거다.”
-정치권에서 공감대는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쳐도, 결국 어떤 제도를 택할 것인가를 놓고는 각 당 안에서도 이해가 첨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에서 논의한다고 하지만 의원들의 정치적 생명이 걸린 문제라서 현역 의원들에게 현저히 불리한 선거제는 통과될 리 만무하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본인에게 불리한 제도를 들이밀며 ‘너 떨어지더라도 선거제 개혁을 받아라’라고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 아닌가. 지혜를 짜내면 현역 의원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않으면서도 현행 선거제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환경이 만들어졌을 때 최소공배수라도 찾아 한 발짝이라도 뗐으면 한다.”
-당장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를 언급하니, 민주당 안에서도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현행 의석 분포상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압승했고 호남도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으니까 변화가 오면 민주당 의원들에게 불리한 선거제로 갈까 봐 우려하는 것도 있을 거다. 게다가 사실 민주당이 선거제 개혁을 말할 환경은 아니었다. 그동안 사정 정국이 계속됐잖나. 국민의힘은 임시체제이고 이 대표가 윤 대통령을 만나려고 해도 윤 대통령이 상대도 안 해주니 선거제 문제를 제기할 여건이 안 됐다. 선거제 개혁이 이미 화두가 된 만큼 중대선거구제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대할 거냐를 놓고 서로 밀당(밀고당기기)할 것이 아니라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에 우선 합의를 하고 정개특위에서 최대한 의견을 압축해 국회의원 전원위원회에서 논의하는 게 좋겠다.”
-21대 국회 직전에도 선거제 개혁을 향한 불은 붙었지만, 위성정당이 탄생하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왜곡한 실패작으로 끝났다.
“이해찬 전 대표 때 일이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이 처음부터 위성정당을 표방하니까 잘못하다가는 자유한국당 쪽에 과반을 내줄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민주당도 위성정당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천벌을 받을 짓을 한 거다. (민주당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 표가 정의당이든 녹색당이든 제3당으로 흩어지지, 자유한국당 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을 거다. 이번엔 다르다. 그때보다 선거제를 제대로 개혁해야 한다는 열기가 뜨겁다. 여야 의원들이 참여한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과 청년 정치인들의 모임인 ‘정치개혁 2050’ 등이 있어 지난번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과연 선거제라는 제도의 개혁만으로 정치 양극화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까.
“그렇다. 지금은 선택지가 둘밖에 없으니까 지지가 양당에 몰리는 거다. 실질적인 다당제가 되면 거대 양당이 30%를 받기도 힘들 거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 게 정당인데 가령 유승민 전 의원, 이준석 전 대표와 윤 대통령이 같은 당이라는 게 말이 되나.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조응천 의원을 영입했지만 조 의원이 자신의 소신을 말하면 당원들이 ‘수박’(민주당 내 보수 인사를 일컫는 용어)이라고 공격한다. 그러니까 민주당도 다당제가 되면 입장이 맞는 사람들끼리 분할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기호 1∼2번이 아니면 생존이 어려우니까 그 안에서 주도권을 쥐겠다고 쟁투를 벌이는데 그럴 일이 아니다. 4∼5개 정당 정도가 원내에 있으면 어느 당도 과반은커녕 100석도 넘는 정당이 나오기 쉽지 않을 거다. 그러면 사안별로 연대할 수 있고 분열도 치유될 수 있을 거다. 3당 합당(1990년) 전 노태우 정부 때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법안을 처리해 어느 때보다 만장일치 통과가 많았다.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있을 땐 정치적으로 경합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타협의 정치를 펼쳤다. 지금 우리는 극단적인 갈등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다.”
-참여정부 땐 소선거구와 중대선거구를 혼합한 도농복합선거구제를 내놨다.
“도농복합형은 지금은 도입하기 어렵다. 대도시는 민주당이 싹쓸이했는데, 그걸 중대선거구로 내어주자고 하면, 민주당이 받을 수 없다. 모든 제도엔 일장일단이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이 소선거구제가 가져온 병폐가 분열을 극대화시키기 때문에 바꾸자는 것 뿐이다. 보통 학계에서는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안정된 체제라고 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려면 비례대표를 많이 늘려야 하는데, 지금 국민의 정치 불신이 커서 가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대통령 권한을 국회로 분산시키는 분권형 개헌과 국회의원 늘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지역구 의원을 확 줄일 수도 없으니…. 국회가 우선 선거제를 바꿔 국민에게 국회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신뢰를 주고, 그때 가서 국회의원 수를 늘리자고 제안한다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거다.”
-민주당에선 개헌 카드를 함께 꺼내들었는데.
“개헌은 이해관계가 첨예해 선거제 개혁과 맞물리면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 선거제를 바꾸고 국회가 국민에게 어느 정도 신뢰를 회복한 뒤 분권형 개헌 얘기를 꺼낼 필요가 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개인적으로 지금 딱 20년 전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노무현 정부 때 선거제 개혁 협상을 했던 당사자로서, 20년 전 노 전 대통령이 국회 첫 시정연설에서 제안했던 수준이라도 이번에 이뤄졌으면 하는 소망이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