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항의 속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253개 지역구에서 1명씩, 비례대표로 47명을 선출해 모두 300명이다.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는 지역주의와 결합해 지역을 기반으로 한 거대양당의 독식을 불렀다. 2004년 총선 때부터 정당명부 투표가 실시됐지만 비례의석 수가 너무 작아 정당득표율 만큼의 의석도 배정되지 못했다. 비례성과 대표성의 문제가 커서 정치권은 거듭 선거제도 개편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각 정당과 현역의원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엇갈리며 개혁은 번번이 무산됐다. 21대 국회에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게임의 룰’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을까.
노무현 대통령 ‘지역주의 타파’ 선거제 개혁 주장
윤석열 대통령에 앞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했던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영·호남 지역당’으로 굳어진 거대양당 구조를 깨려면 서로 다른 지역에서 국회의원 당선자를 낼 수 있는 중대선거구제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 당선 직후였던 2002년 12월23일 “2004년 총선에서 중대선거구제로 지역 편중성이 극복됐을 때 과반수 의석을 획득한 정당 또는 과반수 연합에 총리를 넘기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지켜야 한다”며 자신의 공약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민주당의 ‘영남표 잠식’을 우려한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당시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은 2003년 11월 언론사 기고에서 “중대선거구제는 일본에서도 고비용정치의 주범으로 폐기된 제도”라며 “위기에 몰린 부패정치세력들의 기득권 유지방안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에 노 대통령은 2003년 12월17일 국회의원 전원에게 편지를 보내 도농복합선거구제(농촌·소도시는 소선거구제, 대도시는 중대선거구제 적용)를 ‘절충안’으로 제안했다. 노 대통령은 또 “여러 이유로 소선거구제를 고수해야 한다면, 최소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만은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야당의 반대가 이어지자 노 대통령은 2005년 대연정까지 제안했지만 한나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16대 국회(2000~2004년)에서 한나라당 대변인과 정치개혁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박종희 전 의원은 17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20년 전과 비교해 환경·복지 등 정당이 다뤄야 할 이슈가 다양해졌다”며 중대선거구제 도입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으로 소수정당이 (국회에) 진입하면, 죽기 살기로 싸우는 진영 갈등을 완화하는 쿠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며 “공천이 곧 당선인 영·호남 의원들은 반대하겠지만, 지도부가 대승적으로 도입에 합의한다면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4년 10월 헌법재판소는 ‘선거구 간 인구편차를 2대 1 이하로 줄여야 한다’며 공직선거법의 헌법불합치를 결정했다. 국회가 선거구를 재조정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5년 2월 지역구도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석패율제를 도입하면서 지역구 의원을 기존 246명에서 200명으로 줄이고, 비례대표는 두배 가까이(54명→100명) 늘리는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을 국회에 냈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도 같은해 7월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전제로, 기존 300명인 국회의원 수를 369명으로 늘리는 혁신안을 제시했다. 전국을 몇개 권역으로 나누고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수를 배정한 뒤 그 의석을 정당득표율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 권역별 비례대표제다. 석패율은 지역구에서 아깝게 낙선한 후보를 비례대표로 구제하는 제도다.
하지만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영남 지역구 의석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하며 중앙선관위의 정치관계법 개정안을 반대했다.
선거구 재획정 과정에서 인구 수가 적어 자신의 지역구가 통폐합될 수 있는 여야 농촌 지역구 의원들은 되레 ‘비례대표 축소’를 주장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비례대표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지역 대표성이 훼손되면 안 된다. 이를 원칙으로 정개특위 협상에 임해 달라”(2015년 8월28일 비공개 의원총회)는 뜻을 당 의원들에게 전했다. 같은해 9월11일 열린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선거구 획정을 둘러싼 지역 의원들의 집중 질의가 이어졌다. 당시 강기윤 새누리당 의원(창원 성산)은 “(농촌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건 괜찮느냐”며 농촌 지역 의석을 절대 줄여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여야 간 논의가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새누리당 소속 이병석 정개특위 위원장은 그해 11월9일 지역구 의석(246석)을 260석으로 늘리되, 나머지 40석의 비례대표 의석은 정당 득표율에 따른 의석수의 과반을 보장하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당시 이를 ’균형의제’라고 불렀지만 향후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이렇게 되면 안정적인 과반 의석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며 거부했다. 새누리당의 19대 총선 의석수는 과반을 겨우 넘긴 152석이었는데 균형의석제를 적용하면 기존보다 2∼3석을 잃어 과반의석이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논란 끝에 여야는 2016년 2월 기존 선거제도를 유지한 채 비례대표 의석수를 줄여 지역구 의석수를 7석 늘리는(지역구 246석→253석, 비례대표 54석→47석) ‘개악’에 합의했다. 비례대표 의석을 희생해 여야가 ‘텃밭’인 영·호남 농촌 선거구를 지킨 결과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비례성을 강화하는 선거제 개혁 방안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한 방식인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을 약속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각 정당 득표율에 맞춰 의석수를 할당한 뒤, 배분한 의석수보다 지역구 당선자가 부족할 경우 비례대표 의석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정당 득표율과 실제 의석수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민심이 그대로 반영되는 제도’로 평가된다.
20대 총선 당시 더불어민주당과 새누리당은 각각 25.54%, 33.5%의 정당 득표율을 얻었지만, 실제 의석수는 123석(점유율 41%), 122석(40.67%)으로 과대대표됐다. 정의당은 7.2%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지만 6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정당 득표율이 의석 수에 제대로 반영됐다면, 원내 300석 가운데 21석을 차지해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수정당인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현행 의원 정수(300명)를 고정한 채, 정당 득표율로 의석수를 배분하게 되면 거대 양당이 기존 제도보다 의석을 잃게 된다는 점이었다. 자유한국당은 선거제도 개혁에 강하게 반대했고 ‘비례성 강화 선거제도’를 대선 공약으로 내놓았던 민주당도 ‘2020년 총선 승리’를 명분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받아들이기 어렵다”(이해찬 대표)며 입장을 바꿨다.
2018년 12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합의를 요구하며 열흘간 단식하자 비판 여론을 의식한 민주당은 자유한국당을 포함한 야4당과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적극 검토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합의를 깨고 선거제 개혁 논의를 아예 거부하자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정의당,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등 ‘4+1 협의체’는 2019년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선거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국회의원 정수를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으로 유지하면서, 이 가운데 30석은 ‘준연동형’(연동률 50%), 나머지 17석은 기존 방식대로 정당득표율에 따라 단순 배분하는 ‘병립형’이었다.
정당득표율에 따른 비례성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는 방식이었지만 선거법 개정에 반대했던 미래통합당(자유한국당의 후신)은 ‘비례대표 전용 위성정당’(미래한국당)을 창당하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했다. 민주당도 이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했다. 제1야당의 반대를 뚫고 패스트트랙 방식으로 어렵사리 선거법 개혁을 위해 한 걸음을 내디뎠던 민주당이 입법 취지를 스스로 배신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 정개특위 위원장이었던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중지를 모으는 논의 과정이 부족하다 보니 정치적 합의가 불충분했다. 또 제1야당이 빠진 상황에서 선거제 개혁이 정쟁의 한복판에 빨려 들어가면서 국민적 동의 과정도 취약했다”고 회고했다. 심 의원은 “이번 선거제 개혁 논의는 특정한 제도의 장단점이나 유불리를 따져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성·비례성을 강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이 무엇인지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선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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