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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중대선거구제가 연초 정가에 복잡하고 미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국회의원 선거제도 문제를 툭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선거제도는 ‘여당 대 야당’으로 전선이 형성될 수도 있지만, 같은 정당 의원들끼리도 지역이나 선거구 사정에 따라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이번 논란이 2024년 4월 총선 국면과 맞물리며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폭풍을 불러일으키듯, 먼 훗날 큰 정치적 변화의 출발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확히 뭐라고 말을 한 것인지, 이후 정가의 논의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1월 2일 치 <조선일보> 정치·사회 분야 인터뷰에서 나왔습니다. 개헌과 선거구제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길지 않습니다.
—정치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해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 개헌, 중대선거구제 도입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개헌이라는 게 워낙 폭발적이라 지금 개헌 얘기가 나오면 민생과 개혁 문제는 다 묻힐 것이다. 다만 이제 선거제는 다양한 국민의 이해를 잘 대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하는데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 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 그래서 지역 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정치 시작 전부터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다. 중대선거구제를 통해서 대표성이 좀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집권 세력 내부에서 이미 검토를 마치고 상당 수준의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기존의 정치 문법입니다. 정치부 기자들이 즉각 집중 취재에 들어갔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당장 용산의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진화에 나섰습니다.
“대통령이 구체적인 안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다. 정당들이 이해관계가 있어 논의해 봐야 하는 사안이다.”(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국민의힘 지도부도 일단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들을 중심으로 1차 (선거구제) 논의를 이어가고 필요하다면 정책 의원총회를 열어서 우리 당 입장을 정하도록 하겠다.”(주호영 원내대표)
오히려 친윤석열계 의원들은 반대하고 비윤석열계 의원들은 찬성하는 희한한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국민의힘 세력이 강한 영남과 강원 등지의 친윤석열계 의원들에게는 현행 소선거구제가 당선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1월 4일 국민의힘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들과 긴급회의를 한 뒤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선거구제와 중대선거구제의 장단점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에 최종적으로 정개특위 의견을 정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중대선거구제가 득표에 따른 의석을 보장하고, 폐단이 있는 양당 정치보다는 다당제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급적 중대선거구제로 옮겨갈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해보자는 정도의 이야기가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체면을 조금 세워준 셈입니다.
좀 더 흥미로운 반응은 민주당 쪽에서 나왔습니다. 이재명 대표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장단점이 있다. 장점으로는 ‘소수자 진출이 가능하다’, ‘신인 진출이 용이하다’ 이런 주장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득권, 소위 유명하고 경제력이 큰 사람들만을 위한 장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신인 진출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런 장단점을 충분히 고려해서 당내 의견을 모아가는 중이다.”(1월 2일)
“다당제 제3의 선택이 가능한 정치 시스템이 바람직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방식이 중대선거구제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례대표를 강화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치개혁, 정치교체를 말씀드릴 때도 ‘비례대표 강화’라는 표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당내 의견 수렴 중이라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1월 4일)
민주당 의원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습니다. 찬성이나 반대하는 집단을 특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의원들 각자의 정치 철학에 따라 다르고, 중진이냐 초재선이냐에 따라 다르고, 지역구가 수도권이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고, 지역구 사정이 어떤가에 따라 또 달랐습니다.
전해철 의원은 지난 3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 검토 필요성을 밝히고, 김진표 국회의장이 3월까지 선거제도 개편을 확정하는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였습니다. 환영합니다. 승자독식 체제의 현행 소선거구 위주의 제도하에서는 정치권의 극한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할 수 없고 국민의 뜻을 선거 결과에 제대로 반영하기도 어렵습니다. 중대선거구제나 연동형·권역별 비례대표제 등 비례성과 대표성을 보장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정치권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제시되고, 최적의 대안을 찾는 논의가 신속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전해철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의 민정수석비서관을 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장관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친노-친문 정치인이 윤석열 대통령의 제안을 환영하고 나선 것입니다.
전해철 의원은 친노-친문 의원 64명이 함께 하는 ‘민주주의 4.0 연구원’ 이사장입니다. ‘민주주의 4.0 연구원’은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중대선거구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민주당 의원 모임 가운데 가장 큰 ‘더 좋은 미래’(대표 강훈식)도 중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 등 선거법 개정을 주제로 지난 연말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4.0 연구원’과 ‘더 좋은 미래’ 소속 의원들이 다 중대선거구제나 비례대표제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치열한 내부 토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야 의원 49명이 참여한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과 청년 정치인 10명이 모인 ‘정치개혁 2050’도 선거제도 개혁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정답’ 없는 선거제도…합의 땐 정치사 굵은 획
이처럼 의원들의 선거제도 개혁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지만, 선거제도의 틀을 바꾸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선거제도에는 이른바 ‘정답’이 없습니다. 모든 선거제도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선진국도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제각각의 선거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당장 2024년 선거를 치러야 하는 의원들의 유불리가 엇갈립니다. 자기가 떨어질 가능성이 큰 선거제도에 의원들이 찬성할 리 만무합니다. 의원들도 사람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따라서 선거법 개정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등 여야 지도부의 정치개혁 의지와 리더십, 여야 의원들의 대승적 결단, 각 정당 열성 지지자들의 숙의, 학계와 언론의 전폭적 지원 등 다양한 요소가 필요합니다.
어느 집단이든 단독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관철할 수 있는 힘은 갖지 못했지만, 저지할 수 있는 힘은 가졌다고 봐야 합니다.
앞으로 “선거제도 개혁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개헌이 더 중요하니 개헌부터 해야 한다”, “이 제도는 이래서 안 되고, 저 제도는 저래서 안 된다”, “이번에는 합의만 하고 5년 뒤에 시행하자”는 등 다양한 물타기 의견이 쏟아질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다 현재의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의 반대 의견에 불과합니다.
선거법 개정이 이처럼 어려워진 것은 우리나라 정당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현행 소선거구제 선거법은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등 ‘1노 3김’ 시절에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정당의 주인은 총재였습니다. 1987년 12월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대선에서 패배한 김영삼-김대중 총재는 야권통합 논의 와중에 소선거구제에 합의했습니다. 민정당의 노태우 총재도 ‘소선거구제를 하면 민정당이 200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안기부 보고를 믿고 소선거구제를 받아들였습니다. 선거 결과는 전체 299석 가운데 민정당이 125석으로 과반에 못 미치는 참패였습니다. 안기부 선거 예측은 엉터리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 뒤로 정당 내부 권력 구조가 크게 변화하면서 총재가 가졌던 권력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아예 총재라는 직책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정당에서 제왕적 총재가 사라진 것은 바람직했습니다. 그러나 총재들의 ‘협상과 타협’이라는 정치의 중요한 동력이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선거법 개정 논의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의원들의 복잡한 이해를 조정하고 제압할 수 있는 당내 리더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선거법 개정 논의는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보다 ‘여야 합의로 선거법 개정이라는 결과물을 과연 내놓을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1노 3김’ 시대 이후 사라진 대화와 타협에 의한 정치를 35년 만에 되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소선거구제든, 중대선거구제든, 권역별 비례대표제든 제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여야가 선거제도 변경이라는 큰 틀의 합의를 이룰 수만 있다면 각 제도가 가진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세밀한 합의도 가능할 것입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올해는 정치개혁을 위해 국민이 주는 마지막 추가 시간이다. 절박한 시간인 만큼 모든 노력을 쏟아 반드시 정치개혁을 이뤄내야 한다. 한 표라도 더 얻기만 하면 당선되는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를 바꿔야 한다. 중대선거구제냐 연동형 비례제냐를 놓고 양자택일적으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정쟁화되기 쉬운 제도 하나하나를 우선 논의하는 것보다는 정치개혁의 원칙과 큰 방향 합의부터 이뤄내는 것이 효과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중대선거구제 개편 등은 국회 정개특위에서 여야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한다.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구체적인 안이 준비된 것은 아직 없다. 이재명 대표가 과거에 찬성했지만 지금은 반대한다는 일부 보도는 사실 파악이 제대로 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2020년 21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정의당,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등 이른바 ‘4+1 협의체’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밀어붙였습니다. 자유한국당은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었고 정치개혁은 참담하게 실패했습니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어차피 현행 선거법은 반드시 개정해야 합니다. 선거제도 개혁 의지를 가진 의원들의 분투를 기원합니다.
“1등만 살아남는 제도로 안 돼”…선거제도 개혁은 ‘노무현의 꿈’
선거제도 개혁은 노무현 대통령의 오랜 꿈이기도 했습니다. 사후 자서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오래전에 쓴 글이지만 지금 읽어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확실히 선각자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거제도는 모두 1987년 6월항쟁 이후 ‘1노 3김’의 합의에 이해 만들어졌다. 지금도 그때 만든 틀이 그대로다. 결선투표가 없는 단순다수제 대통령 선거, 역시 결선투표가 없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빈약한 비례대표 의석, 그리고 영호남을 축으로 하는 지역대결 구도, 이 모두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개선된 것이라고는 비례대표 의석을 정당 지지율로 나누기 위해 도입한 1인2표제 하나뿐이다. 그것도 국회가 만든 게 아니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덕분에 겨우 도입할 수 있었다.
20년 넘게 우리의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 구조 속에서 경쟁하고 대립해 왔다. 선거의 승패도, 국회에서 벌어지는 정당 간의 대립도 모두 지역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모든 전문가와 언론과 국민들이 이것을 질타하면서 정책 대결을 주문하지만, 소용이 없다. 현행 제도를 고수하는 한 앞으로도 소용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1등만 살아남는 소선거구제가 이성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역대결 구도와 결합해 있는 한, 우리 정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정치가 발전하지 않은 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한 예가 없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달린 과제이다.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는 모두 최종적으로는 정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영남에서는 모든 인재와 자원이 한나라당으로 몰린다. 호남에서는 민주당으로 몰린다. 그 지역에서는 다른 정당을 통해서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반작용으로 충청도에서도 지역당이 끈질긴 생존력을 유지했다. 수도권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부모와 자신의 출신 지역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정책 개발보다는 다른 지역 정당과 지도자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선거운동 방법이 된다. 정책의 차이가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감정싸움은 몸싸움으로 전환된다. 모든 정당에서 강경파가 발언권을 장악한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발붙이기 어렵다. 국회의원을 대폭 물갈이해도 소용이 없다. 이것이 내가 20년 동안 경험한 대한민국 정치의 근본 문제였다.
성숙한 민주주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이루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제도도 바꾸어야 한다. 지역감정을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모든 지역에서 정치적 경쟁이 이루어지고 소수파가 생존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인재와 자원의 독점이 풀리고 증오를 선동하지 않고도 정치를 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 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독일식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제일 좋겠지만, 대도시에서 한 선거구에 여러 명을 뽑고 작은 도시와 농촌에서는 지금처럼 하나만 뽑는 도농복합선거구제라도, 한나라당이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차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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