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편견뿐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대화를 계속하라. 평화를 만드는 지혜이며, 협상의 핵심이다”. “신뢰는 협상의 조건이 아니라 협상이 얻어야 할 결과다. 믿을 수 없기에 협상을 하는 것이다. 협상의 기술은 줄타기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 때를 아는 것이 협상의 유일한 기술이다.” 통일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이 자신의 저술 <협상의 전략>과 <한겨레> 최근 칼럼에서 밝힌 ‘협상관’이다.
김 후보자는 임동원·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협상론자’다. 그는 ‘남북관계 개선이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 과정을 촉진·견인할 수 있다’고 본다.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 이후 한반도 정세의 흐름을 “한반도 평화 과정”으로 이해한다. ‘북한 비핵화’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비핵화는 중요하되 한반도 평화 과정의 부분집합이다. 비핵화를 한반도냉전구조 해체 과정의 부분집합으로 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 문 대통령의 ‘숨은 참모’다.
문 대통령이 왜 김연철 원장을 새 통일부 장관 후보로 낙점했는지는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 직후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메시지에 오롯이 담겨 있다. “제재의 틀 내에서 남북관계 발전 방안을 최대한 찾아주기 바란다. 속도감 있게 준비해주길 바란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6월14일 1차 북-미 정상회담 직후 국가안전보장회의 이래 8개월 만에 다시 회의를 직접 주재해 내놓은 메시지다. “최대한”과 “속도감”에 방점이 있다. 문 대통령이 새 통일부 장관한테 부여한 임무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적극적인 대북 정책 추진’이다. 그게 바로 문 대통령이 “급선무”라고 강조한 “미국과 북한 모두 대화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자 “북-미 대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정책 판단이 깔려 있다.
김 후보자의 특징은 조명균 현 통일부장관과 비교를 통해 좀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조 장관은 행정고시 출신의 정통 통일관료로 “안정적인 대북 정책 수행”을 중시한다. 한반도 정세가 격동하는 시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는 긍정 평가가 있다. 반면 “‘제재 포비아’에 사로잡혀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는 혹평도 많다. 문 대통령은 조 장관을 제3자의 추천 없이 직접 골랐다. 그만큼 신임이 두터웠고, 교체가 필요하다는 여론에도 쉬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교체를 결정했다. 문 대통령이 조 장관에 대한 긍정보다 부정 평가 쪽으로 기울었다는 방증이다.
김 후보자는 조 장관과 달리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경험을 쌓았다. 학계·경제계·언론계·관계를 두루 거치며 문제의식을 현실에서 가다듬어왔다. ‘안정’을 중시하는 조 장관이 ‘때’를 기다리는 쪽이라면, 노마드적 기질이 강한 김 후보자는 ‘때’를 기다리기보다 만드는 쪽을 선호한다. 김 후보자가 이끌 통일부의 발걸음이 지금까지보다 빨라지고 광폭이리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김 후보자는 원래 학자다. 1996년 “북한의 산업화 과정과 공장관리의 정치학”을 주제로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쉽게 풀이하면 북한 수령제의 경제적 기원을 파헤쳤다. 북한의 독특한 정치체제와 경제정책의 내적 연관에 밝다. 지금은 휴직 상태이지만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2010년~)다. 1997~2002년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북한연구팀 수석연구원으로 일했다. 이 기간 그는 삼성의 대북사업 모색에 관여하며 북쪽 관계자들과 폭넓게 접촉했다. 2004~2006년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으로 6자회담 9·19공동성명 채택과 남북관계 복원 과정에 직접 관여하거나 측면 지원하는 구실을 했다. 2008~2010년엔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을 지냈다. 2009년엔 제15회 통일언론상 대상을 받았다.
김 후보자는 1964년 동해에서 나서 1983년 북평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강원도의 산천을 누비며 분단의 고통을 뼈 속 깊이 각인했다. 어려서 품은 ‘문학청년’의 꿈이 커서 ‘평화의 전도사’로 진화한 까닭이다. 김 후보자는 <냉전의 추억> <협상의 전략-세계를 바꾼 협상의 힘> <70년의 대화-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등 스테디 셀러의 저자이자 <한겨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왔다. 난해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시민의 눈높이에 맞춰 간명하고 쉽게 풀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가 있다. 예컨대 그는 문 대통령의 ‘평화경제론’을 “평화는 땅이고, 경제는 꽃이다”(1월21일치 <한겨레> 칼럼 제목)라는 간명한 문학적 비유로 풀어낸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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