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7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예비역 대장 빈소.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국가보훈부가 24일 국립대전현충원 누리집의 백선엽 예비역 대장 안장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고 적은 문구를 일방적으로 삭제했다. 백선엽은 21살 때인 1941년 일제 꼭두각시 군대인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고, 1943~45년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설립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 그 자신도 회고록 <군과 나> 일본어판에서 “주의주장이 다르다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었다”고 친일 행위를 인정한 바 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정했다. 그런데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 과정도 없이 멋대로 ‘친일’ 기록을 삭제한 것이다.
보훈부는 문구 삭제 이유로 “다른 안장자에 대해서는 범죄경력 등 안장 자격과 관계없는 다른 정보는 기재하지 않으면서 특정인에 대한 특정 사실만 선별하여 기재하도록 한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백선엽 장군을 욕보이고 명예를 깎아내리려 했다는 강한 의심과 함께 안장자 간 균형성도 간과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지난 6일 “가당치도 않은 친일파 프레임으로 (백 장군을) 공격하는 건 옳지 않다”고 말한 것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문구 기재가 사회적 합의로 이뤄진 것임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폄훼하는 주장이다. 백 대장을 두고는 친일 족적이 뚜렷한 인물을 한국전쟁 전공이 있다고 해서 순국선열의 넋이 서린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뜨거웠다. ‘파묘’ 주장까지 제기되는 등 갈등이 커지자, 결국 묘소는 두되 기록은 남기기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리한 것이다. 한 인물의 공과 과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기록하는 게 옳다. 박 장관 스스로 그렇게 말했다. 백 대장의 한국전쟁 ‘공’까지 다 없애자는 게 아니다. 그런데 특정 이념 잣대를 들이대며 과오를 아예 지우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균형감’ 운운하니, 이런 억지가 없다.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에 맞서 지난한 투쟁 끝에 광복을 맞았다. 우리 헌법은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명토 박고 있다. 지금 ‘박민식 보훈부’가 보이는 일방적 행태는 국가 정통성의 근간을 흔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사회적 합의 없는 ‘친일’ 문구 삭제는 즉각 철회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