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용 ㅣ 전 경정·범죄학 박사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아무개(당시 22살)씨는 당시 항소심 재판에서 “범행을 허위진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은 “자백 내용이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 없다”며 검증되지 않은 증거를 바탕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가량이 지난 2019년 화성연쇄살인의 범인으로 밝혀진 이춘재가 8차 사건이 자신의 범행이라고 밝히면서 윤씨는 누명을 벗었고 재심을 준비 중이다.
범죄수사를 하다 보면 다양한 이유에서 비롯되는 거짓진술과 허위자백을 접하게 된다. 거짓진술과 허위자백은 같은 맥락상에 있지만 미묘한 차이를 갖고 있다. 거짓진술은 주로 사건의 참고인, 목격자 등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호하거나 모함하기 위해 그 장소에 누군가가 없었음에도 있었다고 하거나 있었음에도 없었다는 거짓진술을 한다. 허위자백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조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범인으로 인정하는 허위자백의 순간부터 사건의 본질 자체가 조작된다.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자신이 범인이라고 스스로 허위자백을 하기도 한다.
죄가 없는 사람이 중형이 선고되는 상황이 충분히 예상됨에도 허위자백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허위자백은 분명히 이상심리에 의한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당사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고통에 의한 결과이다.
어떠한 상황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가.
용의자로 지목된 당사자는 체포되어 일상생활이 차단된 상태에서 유죄임을 확신하는 수사관의 단호한 태도와 맞서게 된다. 이 상황 자체가 가장 먼저 심리적 압박을 느끼는 부분이다. 누구도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고립되게 된다. 물론, 유죄한 자들도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유죄인 자는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하면서 추궁을 회피하지만 무죄인 자는 ‘이 정도 증거’가 있음에도 자백을 하지 않는
자신이 모든 이에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보여진다는 시선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끝없이 반복하여 무죄를 주장하는 것에 스스로 무력감을 느낀다. 더군다나 이 추궁은 언제 끝날 것이라는 기약이 없다. 시간이 지나도 더 이상 달라질 것은 없고 오히려 자신의 미래는 추궁을 하는 수사관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간혹 보여주는 수사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자신이 범인이 되고 만다.
어떠한 심리상태에서 자신이 범인이 되는가.
무고한 사람은 이 끝없는 두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허위자백을 하더라도 결백하기 때문에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을 기대한다. 중형이 예상되지만 결백한 사람에게 있어서 ‘중형’이라는 처벌은 그저 가능성일 뿐이다. 즉, 처벌에 대한 현실감이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범행을 저지른 줄거리를 만들고 본격적인 범인이 된다. 이렇게 되면 수사관은 실제 현장 상황과 범인이 된 자가 진술하는 상황이 일부 맞지 않아도 끼워 맞추게 된다. 이렇게 억울한 사람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범인이 되고 만다.
수사 시스템은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진술을 녹화하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 인권적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사각지대는 있을 것이라는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이춘재는 밝혀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사건을 수사함에 있어서 범인을 잡겠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잘못된 일들에 대한 철저한 확인과 반성이다. 이제 와서 공소시효가 끝난 당사자들을 찾아내어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확인과 반성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노력이지만 회피는 사법부 모두의 무책임한 도피일 뿐이다.
2020년. 과학의 발전은 범죄의 발전과 비례하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수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억울한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었을 때 과학으로 진실을 밝혀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