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ㅣ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가스라이팅’ 또는 ‘가스등 효과’는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여 자기 의심을 가중시켜 스스로의 의사결정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현상을 지칭한다. 원래 이 용어는 1938년 영국에서 공연된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했다. 지속적인 거짓말과 혼란을 유발하여 남편이 아내를 결국 정신병으로까지 몰고 간다는 스토리는 인간의 합리적 의사결정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회의하게 만든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집 안의 조도를 좌우하는 가스등의 역할인데, 남편은 일부러 집 안을 컴컴하게 해놓고는 아내가 ‘어둡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핀잔을 주고 그렇지 않다고 회유하며 결국 아내를 자신의 판단능력까지 의심하게 만들어 완벽한 의존 상태로 몰아간다.
가스등 효과는 아마도 ‘세뇌’라는 현상을 개인 수준으로 축소한 개념일 것이다. 세뇌란 용어는 1950년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헌터에 의해 알려졌다. 당시 그는 중국 정부가 국민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사상화하여 정부 정책에 협조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현상을 지칭하는 데에 이 용어를 활용하였다. 이후 이 용어는 베트남전 등 전쟁 중 일어난 전쟁 포로의 이념 변화 및 각종 이단 집단에서 발생한 종교적 신념 체계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널리 적용되었다. 이 주제를 다루는 서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스트 메이를로의 <마음의 강간>(The Rape of Mind, 1956년)이다. 그는 이 책에서 전체주의 사회에서 세뇌는 개인의 사고를 컨트롤하여 사람들을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하면서 자유민주주의만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책을 쓴 시기가 냉전 시대란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주장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세뇌에 해당하는 심리사회적 기제가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미시론적인, 세뇌 과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뇌기능 상의 변화이다. 인기 서적인 <세뇌: 사고 통제의 과학>(Brainwashing: The Science of Thought Control, 2004년)이란 책에서 생물학자 캐슬린 테일러는 세뇌에 오래 노출된 사람의 중추신경계는 신경학적 경로들이 훨씬 경직되어 있어서 상황에 대한 판단능력이 결국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아동청소년기에 특정한 방향으로 인지적 정보를 처리할 것을 강요하는 경우, 그와 관련된 뉴런들의 경로만 발달해 다양한 네트워크로 연결이 어려워짐을 시사하였다. 고문이나 강요 등으로 개인이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재량권이 축소되는 경우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한다.
사회심리학자들은 개인의 의사결정이 언제나 합리적이며 이성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지적해왔다. 우리의 비판 능력은 다양한 인지적 오류와 타인의 왜곡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특히 왜곡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는 가스라이팅 효과처럼 하나의 개인일 수도 있지만, 세뇌 현상처럼 전체주의적인 집단일 수도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고유할 것인가? 필자는 범죄 사건들을 대면하면서 이런 질문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격리된 공간 속에서 여러명에 의해 폭행이나 학대 등 잔혹 행위에 노출되어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사례는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사건이 이미 벌어지고 난 다음에는 많은 이들이 ‘왜 신고를 미리 안 했지’라고 묻고는 하지만, 장기간 지배적인 여러 사람에 의해 특정한 방향으로 설득을 당하게 되면 결국에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추었을 것이라 가정하는 비판적 사고 능력 자체가 마비되곤 한다.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은 감히 탈출 가능성을 생각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디 다양한 생각이 촉진되고 자유로운 의사결정이 가능한 세상에서 소외되는 구성원이 없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