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는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원작자이자 실제 모델이다. 권일용 제공
“드라마를 만든다고 하니 원작 책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고민과 걱정이 앞섰죠. 오직 사건만을 다시 들여다본다면 반대했을 거예요. 막상 드라마(<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를 보니 한 개인이 범죄와 싸운 이야기라기보다, 프로파일러가 팀을 이뤄 어떤 방식으로 왜 싸웠는가를 보여주고 있어서 다행스럽고 감사했죠.”(권일용)
“책을 통해 기존 영화·드라마에서 심리학 천재와 같이 비현실적으로 묘사된 한국 프로파일러의 실체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지금은 당연한 프로파일러 직제가 초기에 어떤 난관과 갈등을 이겨내고 경찰조직 내에 정착했는지 기록하고자 했고요. 이 두가지가 드라마에 많이 반영돼 원작자로서 고마웠죠.”(고나무)
프로파일러(범죄행동분석관)를 주인공으로 한 에스비에스(SBS) 금토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이 인기를 끌면서, 2018년 출간된 동명 원작 논픽션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역주행’하고 있다.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와 고나무 작가가 공동집필한 원작은, 2000년 초중반 한국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유영철·정남규·강호순 사건 등을 중심으로 국내 1호 프로파일러인 권 교수와 프로파일러팀의 분투를 흥미롭게 풀어낸 논픽션이다. 드라마의 방향과 ‘톤 앤드 매너’에 지지를 밝힌 두 원작자에게 드라마를 비롯해 원작과 관련한 뒷얘기들을 물었다. 고 작가와의 인터뷰는 지난 17일 오후 정남규 사건 당시 현장을 함께 답사하며 진행했고, 방송 일정으로 참석이 어려웠던 권 교수는 서면 인터뷰로 대신했다.
지난 17일 오후, 에스비에스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의 원작자인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가 집필 때 취재차 왔던 서울시내 한 사건 현장 부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승훈 기자
원작 논픽션 <악의 마음…>은 미국 프로파일러와 논픽션 작가가 함께 쓴 책 <마인드헌터>의 한국판이라 할 만하다. 드라마에서 국영수(진선규) 팀장이 송하영(김남길)에게 프로파일러 일을 제안하며 건네준 책이 바로 <마인드헌터>다. “미국 프로파일러의 선조 격인 존 더글러스의 일대기를 그린 책인데, 마크 올셰이커라는 작가가 공동 집필했어요. 전기 묘사 대상과 작가가 혼연일체가 돼 공저한 것이죠. 한국의 <마인드헌터>를 쓰고 싶었어요. 실제 권 교수도 초창기 프로파일러가 됐을 때 많이 읽었던 책입니다.” 고 작가가 정남규 사건 현장으로 이동하며 말했다. 정남규는 2004년 1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서울 서남부와 경기도에서 14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으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하다 2009년 교도소에서 목숨을 끊었다. 권 교수의 분석대로 더는 살인을 할 수 없는 연쇄살인범이 자살로 마지막 살인을 한 것이었다.
드라마의 원작인 권일용·고나무 공저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책 표지. 알마 제공
지난 25일 재개된 드라마 <악의 마음…> 파트2에도 해당 내용이 나올 테지만, 권일용과 서울경찰청 수사팀의 프로파일링은 자칫 강도상해죄 처벌에 그칠 뻔했던 정남규를 연쇄살인범으로 체포하게 만들었다. 책에는 이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드라마 속 국영수 팀장의 실제 모델로 프로파일링팀 창설을 주도했던 윤외출 경무관은 과거 고 작가와 한 인터뷰에서 “정남규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범인 검거나 체포에 적극적인 기능을 했던 사실상 첫 사례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프로파일링을 통해 연쇄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면 정남규는 그저 단순 강도로 형사 처벌을 받은 뒤 풀려났을 것이라는 취지였다.
에스비에스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스틸컷. 에스비에스 제공
당시 허름한 주택가였던 현장은 지금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고 작가는 <악의 마음…> 집필을 위한 취재를 한 2년 동안 이곳을 수차례 답사했다. 프로파일러가 악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면, 논픽션 작가는 프로파일러의 마음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권 교수님이 느끼고 생각한 걸 최대한 따라 했죠. 프로파일러팀의 활동과 고민을 가장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권일용 되기’였어요. 가령 그 시점의 권일용이 다녔던 사건 현장에 가는 건 물론이고, 2000년 프로파일러로 발령받았을 당시 권일용의 책상에 있던 책을 따라 읽기도 했죠. 그의 당시 생각, 성장 과정 등 인간 권일용이 지나온 길을 훑어보는 작업을 했죠.” 2017년 <한겨레> 14년차 기자였던 그는 사내벤처로 실화 논픽션 기획사인 팩트스토리 설립을 주도해 대표가 됐다.
그래서일까. 두 원작자는 사건을 소재로 소비하지 않고 피해자들을 연민하고 배려하는 세심한 관점 또한 공유하고 있다. “제복을 입고 살면서 늘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피해자들에 대한 죄책감은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권일용)
에스비에스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스틸컷. 에스비에스 제공
팩트스토리 창업 이후 4년 동안 15개 웹소설 및 실화 논픽션을 기획·개발해 이 중 5건을 영상화 계약으로 이끈 고 대표는 “대본 리딩 때 배우 진선규씨가 ‘원작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고 말해줘 감동했다. 사실 진선규 배우와 닮았다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드라마 <악의 마음…>을 비롯해 범죄 실화 관련 콘텐츠가 인기인 요즘, 권 교수는 “최근엔 온라인 범죄로 인한 피해자가 늘고 있다”며 “드라마를 통해 또 다른 범죄를 막기 위해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하는 기회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했다.
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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