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호 미디어연구가
정말로 우리 사회가 시끄러운 곳인지, 아니면 대중적 관심과 미디어가 일방적 몰이에 능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대단히 빨리 새로운 큰 이슈로 덮여버리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진다. 그 결과 사안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토론과 교훈의 소화 없이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정반대 방식으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어떤 사안이 지루하게 공회전하며, 특히 그중 영양가 없는 부분만 끝없이 반복되어 정작 그 사안에 대해 필요한 다른 부분의 토론과 교훈을 막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남북정상회담록 사안이 하나의 뚜렷한 사례다. 정치적 공방 속에서 한 정치 진영과 어떤 국가기관은 특정인을 매국노로 틀을 짓고자, 다른 진영은 조금의 실언도 없는 무결한 영웅으로 믿고자, 외교의 관례적 룰이고 뭐고 간에 민감한 회담록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판본들에 대한 혼선, 원본의 소실 여부, 삭제한 초본에 대한 논란으로 다툼의 생명력이 연장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껏 해야 발언 맥락의 해석 차이에 머무르게 된 정치적 공방을 걷어내고 기록 관리에 대해 실정법을 위반한 부분이 드러난다면 처벌하기로 하고, 그보다는 기록자료 자체를 중심으로 생각할 때가 아닐까. 당장 녹음 기록도 건재하고 국가정보원에 백업본을 두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초 인멸’ 의도를 상정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자료의 기록관 이관 대상 분류 방식이 이대로 좋은가, 그리고 자료의 중간 작업 버전들을 어디까지 남겨둬야 하는가라는 건조한(즉, 재미없는) 사안들이 남을 따름이다. 그런데 사회적 토론과 교훈의 소화는 오히려 이쪽에서 논할 만하다. 분류 권한의 정치적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그냥 모든 자료를 무조건 기록관에 넣도록 정해야 하는가. 디지털 미디어 덕에 기록 자체는 용량의 한계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등급 지정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하기에 발생하는 스케일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또한 모든 버전을 보존하는 것이 옳은가. 그 경우 자료로서의 참조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어떤 버전부터인가. 국정원본 공개 권한 논란에서 드러났듯 백업본에 대한 공식성의 인정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어떤 사건에 이왕 모여든 관심을 소모적 공방의 반복 말고 좀더 필요한 토론의 영역으로 유도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특정인에 대한 평가 공방전과 달리 무엇을 보존 대상으로 두고, 어떻게 공식본과 백업본의 관계를 규정하고, 중간 버전을 얼마만큼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같은 화두는 다른 영역에도 시사해주는 함의가 적지 않다. 당장 ‘역사의 거친 초본’이라 칭해지는 언론 자체에 적용해도 그렇다. 몇년마다 사이트 개축을 할 때, 이전 기사들의 링크는 얼마나 제대로 보존해놓는가. 보존된 이전 자료들은 수월하게 검색해서 다시 참조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시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아서 누군가가 개인 블로그에 복사한 것이 공식 기록을 대체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문제로 인하여 기사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삭제할 때 첫 발행 기사의 내용은 무엇이었는데 왜, 어떻게 고쳤다고 명시해주는 곳이 얼마나 있는가. 조금 더 나아가자면 온갖 온라인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팩트’임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기록 자료를 긁어모을 때, 그런 것의 주요 제공자인 언론은 자신들이 사안과 관점을 기록했던 맥락과 후속 경과들을 제대로 알리고 연동해주는가.
김낙호 미디어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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