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지 ㅣ 문학평론가
지난달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이 경찰에 의해 목이 눌려 사망한 뒤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거세게 일고 있다. 도시 곳곳이 불타는 모습은 그간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많이 쌓여왔는지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적절한 대응으로 불만을 잠재우기는커녕 시위대를 폭도로 지칭하고 지하벙커에 피신하는 등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하였다.
노예제가 폐지된 지 오래되었어도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물리적, 심리적 착취는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심리는 백인에 비해 월등히 높은 흑인 구금률이 설명해준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마이클 무어는 미국 경제가 이러한 심리를 구조적으로 착취하고 있음을 폭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많은 유명 기업들이 수감자들의 저렴한 노동력을 동원하여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취한다. 교도소 내 흑인 비율을 고려하면 이는 현대판 노예제나 다를 바 없는 셈이다.
이미 공개된 바에 따르면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이 목을 눌러 용의자를 제압하는 것은 사실상 매뉴얼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목을 눌러 제압한 용의자의 3분의 2가 흑인이었다고 한다. 목을 눌린 흑인 용의자 비율이 높은 것도 놀랍지만, 그런 식의 가혹하고 위험한 체포 방식을 매뉴얼로 채택할 수 있는 무감함이 더욱 놀랍다. 목 누르기를 인종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경찰 개인의 재량일 수 있지만, 그것을 체포 매뉴얼로 채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서구에 살다 온 분들에게 종종 듣기로는 차별금지법이 잘 제정된 국가에서는 딱 법에 걸리지 않을 만큼만 사람을 차별하더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 아무리 제도를 촘촘하고 섬세하게 설계하더라도 사람을 교화하거나 개조하지는 못한다. 둘째, 그래도 최소한 제도의 경계선까지는 차별을 막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불거진 미국 사회의 불행은 한 경찰의 악행이 아니라 제도의 악행으로 여겨진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배 위의 선장이 영웅이어야 한다면, 우리는 그의 도구들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특별한 한 사람의 능력에 기대지 않고서는 나아갈 수 없는 제도 내지 공동체는 쓸모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흑인 남성을 숨지게 한 경찰이 개인적으로 악인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진정 악한 것은 그가 한 개인이 아닌 경찰로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 아닐까?
우리 사회 또한 특별한 누군가의 능력에 기대어 제도의 결함을 메우려는 나쁜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령 코로나19로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임대료를 자발적으로 감면해주는 선한 건물주를 칭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고, 이를 정책 차원에서 일종의 ‘운동’으로 권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선량함은 분명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들만큼 충분히 선량하지 않은 건물주도 차고 넘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국에 임차인이 혜택을 받는 것은 건물주의 인품이라는, 순전히 우연적인 요소에 달린 셈이다.
개인의 선량함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사회는 악하다. 그런 사회는 자신의 악함을 숨기기 위해 어떤 개인의 선량함은 한없이 독려하고 어떤 개인의 악함은 철저히 그의 잘못으로 몰아간다. 개인의 선악을 동력으로 굴러가는 사회를 우리는 경계하고 또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