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한 주민이 이스라엘 공습으로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위에 앉아 있다. AP 연합뉴스
신진욱 I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참혹한 전쟁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지금까지 50만명의 사상자와 6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한 가운데, 지난달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해 불과 한달 만에 1만명 이상 숨지는, 특히 5천명 넘는 아이들이 희생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듯이 20세기는, 자유주의의 꿈과 반대로 전쟁과 학살의 세기였다. 냉전 종식 뒤에도 걸프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대규모 전쟁과 보스니아, 시리아, 리비아 등지에서 내전이 계속됐다. 그러나 최근 미국 패권에 대한 중국, 러시아, 북한, 아랍의 도전이 커지면서 전쟁의 위험은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은 전쟁의 시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윤석열 정부는 줄곧 ‘군사적 현실’만 내세우는데, 그런 접근은 정책 자체만큼이나 그 저변에 깔린 관점이 위험스럽다. 현대 국제정치사에서 군사적 현실주의는 오랜 사상적 전통을 자랑하지만, 세계를 국가들의 적대관계로만 보는 믿음에 사로잡혀 평화와 협력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군사적 현실주의는 실은 현실을 군사적으로 재편하는 군사주의다.
또 다른 위험은 인간 없는 지정학이다. 국제관계를 지리적 관점에서 고찰하는 지정학에서 ‘인간’이 빠지면, 지정학은 지도판에서 말을 옮기며 국가 간 동맹과 전쟁을 상상하는 지배자의 과학이 된다. 북·중·러가 손잡고 우리를 건드리면, 한·미·일이 손잡고 저쪽을 절멸한다는 식의 ‘힘의 논리’ 말이다. 그 과정에서 스러지는 수많은 인간이 이 서사에서 지워지는데, 이런 관점이 실제 정부 결정을 구성하는 정책담론이 될 때 비극적 오판이 일어난다.
특히 그러한 군사주의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극우반공주의와 이념적 증오에 연결될 때 극히 위험해진다. 과거 군사정권 때도 북한의 위협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였다. 문제는, 그러한 군사적 긴장을 정권의 이익과 이념적 통제를 위해 악용하는 지배구조였다. 최근 안보위협론과 ‘반국가세력’ 수사는 그 오래된 회로를 은밀히 재가동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 그동안 화해와 협력을 추구해온 쪽도 변화한 시대환경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국가들의 경제적 상호의존, 대화와 신뢰 구축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접근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전쟁이 창궐하는 지금의 현실을 돌파할 패러다임으로는 한계도 명확해졌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과 ‘자유’의 최종적 승리’를 선포했던 리버럴한 시대는 더는 없다.
정치와 운동의 프레임이 사회에서 공명을 얻으려면 사람들이 실제 목격하는 현실을 설명해주는 틀로서 신뢰받아야 한다. 국제정치뿐 아니라 국내 정치와 문화 환경의 많은 것이 변한 오늘날,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노선과 담론으로 진화해가야만 한다.
진보적 시민사회 앞에 놓인 또 다른 과제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자기성찰이다. 팔레스타인 출신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고통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가하고 있”는 역설을 지적하면서, 저항적 민족주의 역시 “그들과 똑같은 거울 이미지가 되”어 “팔레스타인의 시오니즘”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민족과 인종, 국가의 경계를 넘는 해방을 이야기”할 것을 호소했다.(‘펜과 칼’)
역사도, 민족도 인간 위에 있지 않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 누구의 폭력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의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폭력에 항의하고 평화의 비전을 요구해야 한다. 한반도에 대한 우리의 관점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폭력이 폭력을, 증오가 증오를 낳고 있는 이 악업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적대적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민주주의와 인간성, 평등과 평화의 가치들이 힘없는 이상주의에 그치지 않고 시대의 폭력을 이기는 힘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미약한 나는 아직 답이 없기에, 함께 답을 구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진다.
“꿈 때문이었다.” 작가 한강은 꿈속에서 군인들에 쫓기다 그들의 총검이 가슴을 찌르는 순간 잠에서 깨어 숨도 쉬지 못하고 떨며 울다가 눈을 뜬 이야기를 썼다.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펴면서, 어둠 속에서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꿈이었어, 꿈이었어.”(‘소년이 온다’)
독일 베를린에서 나는 국가폭력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느라 매일 전쟁과 학살의 자료를 읽다가, 어느 날 이와 똑같은 꿈을 꾸고 새벽에 깨어 몸을 휘감은 공포를 느끼며 전율했다. 이 공포가 현대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