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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신진욱 칼럼] 정치개혁, 비전 경쟁을 하라

등록 2023-12-17 18:46수정 2023-12-18 02:39

유권자 균열은 독재 때 여촌야도 양상이다가 민주화 후엔 지역주의가 강화됐고, 2000년대엔 세대 균열이 추가되더니, 2010년대엔 계급 균열이, 몇년 전부터는 성별 균열이 중첩됐다. 이처럼 복잡한 균열 구조 안에서, 다수 지지층을 지켜야 하는 정치세력은 문제를 회피하기만 하고, 소수 지지층에 발판을 둔 정치세력은 갈등을 증폭해 세력을 키운다.
남인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남인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신진욱 |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가 정권 출범 후 30%대를 넘어선 순간이 거의 없는 채로 대한민국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이렇게 큰 불만에도 불구하고 국정 기조에 대한 성찰은 없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엔 끝없는 검찰 수사, 극단적 언사들, 언론에 대한 겁박, 그리고 대통령의 권력 탐닉만 가득하다. 이런 정치 상황은 민주화 이후 한번도 없었건만, 우리는 점점 거기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그런데도 더불어민주당의 지지도는 여당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 제1야당에 대한 신뢰가 이토록 약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사회 전반에 만연한 답답한 공기의 큰 원인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도 그랬다. 대통령 지지도가 추락해도 민주당이 대안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두 가지 점에서 그때와 다르다. 민주당은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시민들도 변화를 꿈꾸며 ​행동하고 나서지 않는다.

이처럼 대통령·여당과 제1야당의 기반이 모두 좁다 보니 ‘양당 정치’를 비판하며 ‘제3의’, ‘새로운’,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활발하다. 민주당 탈당파와 정의당 내부 세력이 손잡았고, 국민의힘에선 이준석 전 대표가, 민주당에선 이낙연 전 대표가 ‘신당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들의 지지기반은 제한적이지만 총선 판도를 흔들 만한 잠재력이 있다. 지루하지 않은 선거가 될 것 같다.

그런데 ‘무엇이 새로운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양당 정치에 실망이 커질 때마다 ‘제3지대’를 표방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그중 자유민주연합이나 민주노동당 같은 정당은 한국 사회의 지역 균열이나 계급 균열 같은 현실의 일부를 대변했다. 하지만 지금 양당 구도 타파를 외치는 세력들이 누구를 대변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불분명하다. 이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접착제는 ‘새로움’이라는 모호한 기표다.

이처럼 지금 한국 정치를 특징짓는 것은 맹목성이다. 정치인들이 정치시장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해 뛰는 사이, 정치는 목적 없이 표류하고 사회의 문제들은 계속 방기된다. 정치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고 이런 현실이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다. 정치를 이런 방향으로 끌고 가는 강력한 구조적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가 단지 정치 엘리트 내의 권력 경쟁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다. 정당들은 어떤 계급 이익이나 문화, 역사를 공유하는 사회집단을 대표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협상했다. 그처럼 정치가 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조직하고, 대변함으로써 사회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정책으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치에 기대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21세기 사회구조에선 그러한 민주주의 모델이 작동하기 쉽지 않다. 과거엔 사회가 몇몇 큰 사회집단들로 나뉘었다면, 지금은 직업·소득·부동산·지역·교육·세대·성별·인종·정체성 등 많은 축에서 균열이 집단화, 정치화되어 서로 가로지른다. 그래서 정당들은 특정 사회집단만을 대변할 수 없고, 분산된 개별 이슈에서 입장을 취할 뿐이다. 정치인들은 너무 복잡해진 갈등을 어떻게 대할지 몰라 무대응하고, 그런 무능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영리한 포퓰리스트들이 포획한다.

한국에서도 그런 추세가 장기화하는 중이다. 유권자 균열은 독재 때 여촌야도 양상이다가 민주화 후엔 지역주의가 강화됐고, 2000년대엔 세대 균열이 추가되더니, 2010년대엔 계급 균열이, 몇년 전부터는 성별 균열이 중첩됐다. 이처럼 복잡한 균열 구조 안에서, 다수 지지층을 지켜야 하는 정치세력은 문제를 회피하기만 하고, 소수 지지층에 발판을 둔 정치세력은 갈등을 증폭해 세력을 키운다.

더구나 한국의 승자독식 정치제도 아래에서 정당과 정치인들은 지지층을 관리하고 선거에서 이기는 데 관심이 쏠려 있어서,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장기적 국가 발전 전략을 추진한다는 정치 본연의 역할을 순진한 이상주의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격차’ ‘통합’ ‘청년’ ‘여성’ 등의 언어들은 대중의 환심을 사는 수사로만 소비되고, 정작 현실에 대한 구체적 응답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당이든, 야당이든, 제3세력이든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이루고자 한다면, 판에 박힌 슬로건이나 자극적 정책 상품으로 반짝 경기를 노리는 대신에 구체적인 사회 현안들을 해결할 비전과 리더십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불안정한 일의 세계, 임박한 기후 재난, 저출생·고령화의 덫과 같이, 국민들의 삶에 직결된 핵심 문제들에 대한 비전 담론 없이 정치개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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