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현지시각) 가자지구 난민촌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부상당한 팔레스타인인이 후송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스라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땅에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대인이 전체 인구의 2~3%에 불과했다. 이탈리아계 이스라엘인 통계학자 세르조 델라 페르골라에 따르면, 1800년대 초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는 27만5천명이었고 이 중 유대인은 7천명에 그쳤다. 반면 아랍인은 기독교도가 2만2천명, 이슬람교도가 24만6천명으로 전체 인구의 97%가 넘었다. 이들은 큰 마찰 없이 어울려 살았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중·후반을 지나며 변화를 겪는다.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팔레스타인 고향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면서, 이곳으로 이주하는 유대인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은 이런 흐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영국의 외교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의 유대인 금융가 로스차일드에게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지지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의 지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국은 1918년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던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편입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수는 1922년엔 8만4천명으로, 1931년엔 17만5천명으로 해마다 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엔 63만명으로 늘어나,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된다.
아랍인들이 이에 반발하고 나선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유대인 국가에 내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은 아랍인에게도 독립국가의 건설을 약속했었다. 밸푸어 선언 이태 전인 1915년 이집트 주재 영국의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은 아랍의 지도자 후사인 빈 알리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싸우면 아랍의 독립을 지지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영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랍인의 반발은 1936~39년 폭동으로 이어졌고, 영국은 결국 유대인 이민을 중단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유대인들이 반발했다. 유대인은 단속을 피해 유럽 유대인의 밀항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영국 당국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1946년엔 영국 식민당국의 본부로 사용되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탄테러해 91명이 숨지는 사건을 일으켜, 영국에 큰 충격을 줬다.
혼란이 지속되자 유엔은 1947년 팔레스타인을 아랍국가와 유대국가로 나누는 분할안을 결의했다.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인 1948년 5월14일 텔아비브를 수도로 하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이 분할안을 “우리 땅을 유대인에게 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하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그 뒤 이곳 팔레스타인에는 갈등과 증오, 분쟁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곳에 사는 이들의 고난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지난 7일 가자지구 무장세력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다시 팔레스타인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보복 공격에 나서면서 벌써 양쪽의 사상자가 1만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언제쯤 오랜 갈등과 증오, 유혈을 멈추고 항구적인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박병수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su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