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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산업·재계

삼성과 소송비용 2백억…일반 중소기업이면 버틸 수 있었을까?

등록 2020-11-17 04:59수정 2020-11-20 16:45

‘삼성전자, 벌크핀펫 특허 침해’ 합의 전말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지난 9월 삼성전자는 최소 수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모바일 반도체 특허 사용료를 지급하는 데 합의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피시 등에 쓰이는 3차원 트랜지스터 기술인 ‘벌크 핀펫’(Bulk-FinFET)이 대상이다. 이 기술은 지난 2001년 이종호 서울대 교수(당시 원광대 재직)가 발명해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특허로 등록됐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훨씬 낮은 가격에 기술 사용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해왔다. ‘자체 기술’이라고 주장하며 이 기술을 무단으로 사용해오던 삼성전자는 결국 업계에서 가장 비싼 사용료를 물게 됐다.

지난 10월27일에는 미국 특허청 심판원(PTAB)이 이 교수가 발명한 ‘벌크 핀펫’ 특허의 권리가 유효하다고 최종 결정을 내리면서 ‘특허침해 논쟁’이 삼성전자의 패배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지난 19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년의 이야기는 한국 대기업들이 일삼는 중소기업 기술탈취 관행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쫓겨나다시피 했던 장면 잊혀지지 않는다”

2001년 12월 이 교수는 당시 재직하던 원광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합작 연구를 통해 벌크 핀펫 기술을 완성했다. 이 교수는 카이스트에 특허 출원을 요청했으나, 카이스트는 국내 특허만 출원하고 국외 특허는 예산상의 이유로 거절한 뒤 국외 특허권을 이 교수에 넘겼다. 이후 경북대로 자리를 옮긴 이 교수는 경북대에도 특허 출원을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기술 상용화를 확신했던 이 교수는 특허출원 직후인 2002년 초 삼성전자에 해당 기술을 설명하며 기술 라이선스(사용허가) 계약과 후속 연구에 대한 공동진행을 제안했다. 삼성전자에 찾아온 첫번째 기회였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 교수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당시에 삼성전자는 ‘이건 안 되는 기술’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바꿔 얘기하면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 한 것”이라며 “삼성전자에 가서 2시간 발표하고 쫓겨나다시피 나왔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교와 기업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이 기술이 그대로 묻히는 게 안타까웠던 이 교수는 2003년 2월 개인적으로 미국에 특허를 출원했다. 이후 삼성전자뿐 아니라 국외 기업에도 라이선스를 제안하기 위해 전문기관인 ㈜피앤아이비에 특허 라이선스 중개 업무를 위임했다. 피앤아이비가 가장 먼저 접촉한 국외기업은 당시 반도체 분야 글로벌 1위였던 인텔이었다. 인텔은 핀펫 기술에 대한 상용화 가능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인텔이 제시한 라이선스 금액이 너무 적은 탓에 끝내 계약 체결은 무산됐다.

그로부터 6년 뒤인 2011년. 인텔이 세계 최초로 핀펫 상용화 기술을 완성하고 제품 생산에 돌입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앤아이비는 인텔과 접촉해 라이선스 협상을 제안했고 협상 끝에 2012년 9월 100억원의 사용료 계약에 성공했다. 글로벌 대기업 가운데 첫번째 특허 사용자가 된 인텔은 결과적으로 다른 기업들보다 훨씬 싼 사용료를 지불하게 된 것이다. 이후 삼성전자도 2015년 갤럭시에스(S)6 모델부터 이 기술을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피앤아이비는 삼성전자와도 꾸준히 협상을 진행했으나, 삼성전자는 이 교수의 특허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두번째 기회마저 걷어차버린 것이다.

결국 이 교수는 한국 특허의 전용실시권을 갖고 있던 카이스트의 자회사 ㈜케이아이피(KIP)에 미국 특허 소유권을 이전한 뒤 2016년 케이아이피를 통해 미국 텍사스 동부지법에 삼성전자 등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냈다. 소송이 제기되자마자 삼성전자는 미국 특허심판원에 이 교수의 핀펫 특허에 대한 무효심판을 제기했다.

애플·인텔은 ‘합의’, 삼성은 ‘버티기’

기나긴 싸움이었다. 길게 이어진 재판 과정에선 삼성전자가 이 교수가 재직했던 경북대로 하여금 특허 소유권을 주장하도록 부추긴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특허 침해 소송에서 이 교수가 정당한 특허 소유권자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소송이 기각될 수 있어서다. 이 과정에서 경북대는 업무상 배임으로 이 교수를 형사고소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살면서 검사를 처음봤다. 정말 마음 고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결과는 무혐의였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는 산업통상자원부에 요청해 케이아이피의 ‘산업 기술 무단 유출’ 혐의를 조사하도록 하기도 했다. ‘기술 유출’로 밝혀질 경우 원고 자격이 박탈되는 등 케이아이피가 재판에 불리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조사 역시 ‘기술 유출 혐의 없음’으로 끝났다.

삼성전자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2018년 6월 미국 법원 배심원단은 삼성전자에 4억달러(한화 약 4460억원)를 배상하라는 평결을 내렸다. 특히 배심원단은 삼성전자가 자신들이 사용하는 기술이 특허를 침해하는지 알고도 무단으로 사용했다며 ‘고의 침해’라는 판단을 내놨다. 평결 결과가 확정되는 1심 판결에서 ‘고의 침해’가 인정될 경우 배상액이 최대 3배(12억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삼성전자는 합의 없이 버티기에 나섰다.

이듬해인 2019년 3월에는 애플도 벌크 핀펫 특허 사용료 지급에 합의했다. 2018년 케이아이피가 애플의 특허 침해 행위에 대해 한국 무역위원회에 제소하면서 이 특허를 사용하는 아이폰의 수입 금지를 청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애플도 한국 특허청에 특허 무효 심판을 제기했지만 결국 합의가 이뤄지면서 애플과의 모든 소송은 취하됐다. 애플과의 합의는 인텔과의 합의 시점(2012년)보다 7년이 지나 이뤄졌고 그 기간만큼 더 많은 상품에 특허가 사용됐을 것이므로, 애플의 사용료는 인텔 사용료(100억원)보다 많을 것이라는 게 산업계 안팎의 추측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삼성전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2020년 2월 미국 재판부는 삼성전자의 ‘고의 침해’를 인정한 1심 판결을 내놨다. 미국 텍사스 동부지법은 판결문에 “삼성전자가 케이아이피의 특허 기술을 고의적으로 탈취했다”고 밝히며 2억달러(한화 약 2230억원)를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종호 교수가 2002년부터 꾸준히 삼성전자에 라이선스 계약을 요청했지만 삼성전자가 이 교수에게 기술에 대한 설명만 듣고 기술을 ‘고의적으로 베껴서’ 사용했다고 판단했다. 삼성전자는 1심 판결 이후에도 “핀펫 기술을 삼성이 개발한 자체 기술”이라고 주장하며 항소했다.

버티던 삼성전자의 태도가 바뀐 건 지난 9월. 결국 케이아이피와 특허 사용료 지급에 합의가 이뤄졌다. 1심 판결의 배상액이 2천억원가량이기 때문에 업계에서는 대략 절반 수준의 합의금이 지급됐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기술 발명 초기에 가장 좋은 조건으로 기술사용 권한을 얻을 수 있었던 삼성전자는 글로벌 기업 가운데서도 가장 늦게, 가장 나쁜 조건으로 기술사용 권한을 얻게 된 셈이다.

“약자 기술 무시 관습 타파해야”

소송에 나선 케이아이피가 기나긴 재판을 위해 들인 돈도 약 200억원 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 중소기업이라면 시도조차 힘든 금액이다. 인텔과 애플 등의 사용료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끝까지 버티기 힘들었던 상황이다. 한국 대기업들의 중소기업 기술탈취가 만연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고사 작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인규 케이아이피 대표는 “한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수한 지식재산의 창출과 이에 대한 공격적인 활용이 활성화돼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우선 국내 대기업들은 경제적 약자와 토종 기술을 무시하는 관습을 스스로 타파해야 한다. 또한 국민의 세금으로 연구개발 활동을 수행하는 국내 대학들의 특허 관리 체계 선진화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재 한국 대학의 특허 활용 성과는 낮은 편이다. 지난해 한국지식재산연구원이 발표한 ‘정부 알앤디(R&D) 특허관리 현황 및 시사점: 대학·공공(연)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국내 대학 등의 특허 생산성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특허 활용(기술이전·사업화·창업 등) 비율은 2018년 기준으로 33.7%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 대표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특허의 비중이 높아지도록 특허 창출 전략을 수립하고 공격적인 활용을 하기 위한 전문 역량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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