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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빅 아이디어’가 대통령을 만든다

등록 2007-03-29 21:18수정 2007-04-03 14:34

한국의 제17대 대선 투표일은 올해 12월19일이고, 미국의 제44대 대선은 2008년 11월4일이다. 한국 대선도 그렇지만 미국 대선은 더더욱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대통령 선거운동이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미국에선 이번 선거가 미국 역사상 제일 긴 대선 운동기간이 되었다고들 한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대통령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맨위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미국 민주당쪽 대선 유력주자 힐러리 클린턴, 배럭 오바마. 공화당쪽 주자 루돌프 줄리아니, 존 매케인.
한국의 제17대 대선 투표일은 올해 12월19일이고, 미국의 제44대 대선은 2008년 11월4일이다. 한국 대선도 그렇지만 미국 대선은 더더욱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대통령 선거운동이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미국에선 이번 선거가 미국 역사상 제일 긴 대선 운동기간이 되었다고들 한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대통령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맨위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미국 민주당쪽 대선 유력주자 힐러리 클린턴, 배럭 오바마. 공화당쪽 주자 루돌프 줄리아니, 존 매케인.
유권자 뇌리 꽂힐 강렬한 메시지가
기금 조성·뉴미디어 활용보다 ‘에너자이저’
클린턴 ‘보통사람 잘사는 나라’로 재미 톡톡
대중의 맘 꿰뚫는 아이디어 우린 무얼까
안과 밖 / 미국 대선 필승법칙은

요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누가 말을 꺼내면 먼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다. “어디 대통령 말입니까?” 미국에 있으니 매일 같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뉴스를 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자. 그런데 인터넷 시대에 살다보니 한국의 대통령 선거관련 소식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읽게 된다. 자제해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클릭 클릭, 정치인들의 시시콜콜한 동정까지 파악하고 있는 한심한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집으로 전화를 하던 중 이런 얘길 꺼냈다가 연구년에 하라는 연구는 하지 않고 그런 데에만 신경 쓰고 있다는 힐난을 들은 적도 있다.

한국의 제17대 대선은 2007년 12월19일에 있고, 미국의 제44대 대선은 2008년 11월4일에 열린다. 미국의 경우 시기적으로 아직 먼 것 같은데도 대통령 선거운동은 이미 시작된 거나 다름없다. 자기들 말로 미 역사상 제일 긴 대선 운동기간이 되었다고들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될지도 궁금하지만 미국에서 대통령에 뽑힐 수 있는 조건으로 어떤 변수가 있는지가 내겐 더 큰 관심거리다. 미국에 대선 필승법칙 같은 게 있을까? 이 방면을 조금 들춰보니 실로 엄청난 연구가 축적되어 있었다. ‘대통령학’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만한 학문 분야에서 역사적 패턴, 의회 의석, 정당내 권력분포, 경제상황, 인구추이, 주별 정치동향, 세계정세, 전쟁여부 등등 수백 가지 변수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일반인의 취미 차원에서도 믿거나 말거나 식의 ‘지표’들이 많이 나와 있다. 어떤 야구팀의 그 해 시즌 성적과 민주당 후보 간의 징크스적인 관계 등등. 그렇다면 학문적 분석과 시중 잡담의 중간 수준에 해당하는 통찰은 없을까? 주로 언론에서 일종의 ‘대중 정치학’ (pop politics)에 해당되는 관측을 많이 내놓고 있다. 보스턴에서 나오는 주간신문 <보스턴 피닉스>에 지난 몇 주간 연재된 ‘대선예측 전광판’이라는 분석기사가 다른 메이저 언론보다 내 궁금증을 더 잘 채워주었다. 이 기사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경험칙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 법칙들은 때에 따라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다음 중 1항이 핵심이고 나머지 법칙들의 중요도에는 순서가 없다.

때론 정치꾼 아닌 새얼굴이 유리

법칙 1.

‘빅 아이디어’가 승패를 가른다. 선거운동의 조직화, 기금조성, 인터넷과 같은 뉴미디어의 활용 등이 당락을 좌우한다? 전혀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모두 부차적인 요소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 대선을 결판내는 중심축은 빅 아이디어다. 유권자에게 직관적으로 어필하고, 그들의 심금을 울리고, 그들의 뇌리에 예리하게 꽂혀서 투표 당일까지 지워지지 않는 굵고 강렬한 메시지, 이거 하나가 대통령을 만들 수도 망칠 수도 있다.

케네디는 “다시 전진하는 미국”을 내걸었다. 카터는 워터게이트와 베트남전에 지친 국민에게 “참신한 새 얼굴”을 내세웠다. 레이건은 “큰 정부는 나쁜 정부”라는 구호로 미국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개인주의의 향수를 자극했다. “보통사람이 잘 사는 나라”를 표방한 클린턴은 일종의 중도통합 노선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다. 빅 아이디어가 반드시 논리적이고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 너무 추상적이거나 국가차원의 관심사에서 멀어져도 득표 전략상 감표 요인이 된다. 예컨대, ‘지구온난화 문제 해결’과 같은 주장은 고결한 목표이긴 하나 대선 메시지로는 접착력이 떨어진다. 이상주의자에겐 불만족스럽겠지만 그게 선거정치의 현실이다.

법칙 2.

과거에 출마해 본 사람의 승률이 높다.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다는 것은 발가벗고 몇 년 간 압력밥솥 안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다. 24시간 대기상태, 선거운동 조직관리, 후원금 모금, 언론의 살인적인 검증, 등에 칼이 꽂혀도 미소짓는 심리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대선운동 유경험자와 초심자의 관록 차이는 담배피우는 재수생과 뽀뽀뽀 어린이의 그것만큼이나 크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민주당의 존 에드워즈에게 비교우위가 있다. 레이건이 삼수해서 성공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스로 출마한 적이 없더라도 친지의 출마를 도왔던 경험이 있으면 큰 자산이 된다. 운이 좋으면 예전 후원자들을 몽땅 인수할 수도 있다. 일종의 친인척 무상증여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부시가 아버지 덕을 본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힐러리가 남편 덕을 보고 있는 것은 현재진행형 진리다.

법칙 3.

경우에 따라 전문 정치꾼이 아닌 사람이 유리할 수도 있다. 이 점은 둘째 법칙과 대비된다. 특히 워싱턴 정가가 스캔들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을 때 이 항목이 중요해진다. 부패, 음모, 무능으로 가득 차고 악한들이 활개치는 동네를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단기필마의 카우보이가 평정하고 마을에 (다시!) 정의와 평화가 찾아온다…. 할리우드 서부극의 닳고 닳은 모티프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 점이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부시가 정치판을 워낙 흐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다선 국회의원보다 외부의 주지사나 군지도자 출신이 유리하다. 의회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활동했는지 투표성향의 검증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현직 상원의원으로 대통령이 된 이는 1960년 케네디가 마지막이었다. 정치신인이라는 점에서는 워싱턴의 새 얼굴인 바락 오바마가 상당히 유리하다. 흥미롭게도 힐러리는 워싱턴의 기준으로 보아 묵은 인물로 취급받고 있다.

링컨은 ‘이미지 정치’ 선구자

법칙 4.

대중문화 코드에 선거운동을 맞춘 후보가 유리하다. 대선의 정치학은 대중문화와 거의 같은 말이다. 대중문화 중에서도 텔레비전이 대선의 향배를 가르는 주 전장이다. 유권자들은 선거운동 기간 중 텔레비전을 통해 나타나는 후보들의 이미지를 서서히 만들어 간다. 일일 연속극이 계속되면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시청자의 머릿속에 조금씩 형성되는 것처럼 후보의 이미지도 텔레비전에 반복 노출되면서 일정하게 굳어진다. 대중문화의 힘을 이해하는 유연한 정치인이 외골수 정치인보다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사람을 모으고 그들과 유대를 형성하는 과정은 정치인에게나 대중문화 예술인에게나 똑 같이 중요하다. 1976년 카터는 남부의 록 음악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성공했다.

대중 이미지의 효과를 가장 먼저 터득했던 미국 정치인이 누구일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중엽만 해도 사진술은 완전히 새로운 뉴미디어였다. 일찌감치 사진의 힘을 꿰뚫어 본 링컨은 사진술을 선거운동의 중요한 매체로 점찍었다. 다른 정치인들이 사진을 그저 ‘신기한 애들 장난거리’ 정도로 여길 때였다. 당시만 해도 사진 한 장을 제대로 촬영하려면 카메라의 노출시간에 맞춰 스튜디오에서 오랫동안 꼼짝 않고 렌즈를 응시하고 있어야 했다. 이런 고역을 마다하지 않고 링컨은 수백 장의 홍보 사진촬영을 소화했다고 한다. 9·11 사태의 이미지를 지금까지 써먹고 있는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법칙 5.

유권자의 고른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상식적인 말 같지만 중요한 사항이다. 어떤 정치인은 열렬한 지지와 열렬한 반대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렇게 되면 확실한 비토세력이 형성될 수도 있다. 이것은 대선 후보에겐 마이너스다. 흑백 인종문제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전력으로 인해 대통령에 네 번이나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던 조지 월러스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의 말마따나 정치인은 사랑받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격렬한 혐오나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미 법칙, 한국에 적용한다면?

이렇게 써놓고 보니 한국사람 아니랄까봐 미국 대선을 관찰하면서도 자연스레 한국 대선과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대선법칙 중 어떤 점이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이번 12월 대선에서는 법칙 1과 법칙 3이 제일 근접한 효과를 내지 않을까 생각한다. 빅 아이디어를 놓고 노심초사하는 것도, 새 인물을 기대하는 심리도 비슷하다.

조효제/하버드대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하버드대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특히 빅 아이디어에 대해선 나도 할 말이 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소위 ‘빅 아이디어’들은 대선 메시지의 핵심축으로 간주하기 어려운, 그냥 겉도는 언설에 가깝다. 너무 유치하거나 너무 황당하거나 너무 수준이 높다. 전국토를 화끈하게 파 뒤집어 놓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 흩어져야 뭉칠 수 있다는 불가사의한 논리, 대학원 세미나 발제문 같은 고담준론식 주장이 얼른 눈에 들어올 뿐이다. 대중의 환멸과 희망이라는 ‘나무결’을 잘 살펴 장작을 지혜롭게 쪼갤 줄 아는 안목, 시대정신을 명민하게 포착해서 국민을 끌어당길 수 있는 빅 아이디어는 과연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 조효제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인권펠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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