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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아픈 과거의 실체를 기억해내다

등록 2007-03-15 20:36수정 2007-03-15 20:44

과거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할 것인가? 지금까지 독일에서만 170만의 관객을 동원했고 30개국에 팔려나갔으며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우수 외국영화상을 받은 플로리안 헹켈 폰 돈너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의 한 장면. 영화는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함께 무너져내린 동독,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억압한 그 전체주의사회의 단면을 차분하게 드러내 보인다.
과거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해석할 것인가? 지금까지 독일에서만 170만의 관객을 동원했고 30개국에 팔려나갔으며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우수 외국영화상을 받은 플로리안 헹켈 폰 돈너스마르크 감독의 <타인의 삶>의 한 장면. 영화는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함께 무너져내린 동독,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조직적으로 억압한 그 전체주의사회의 단면을 차분하게 드러내 보인다.
안과 밖 / 영화 ‘타인의 삶’이 던지는 역사메시지

역사적 변동은 미래의 방향뿐 아니라 과거를 평가하는 우리의 시각도 변화시킨다. 중국의 고구려역사 편입작업이나 우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대한 변화는 이러한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역사적 평가에 대한 이러한 변화는 역사가가 과거를 바라보고 그 의미를 해석해내는 잣대와 그가 오늘을 바라보는 현실인식이 서로 얽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추모할수록 사람들이 추후에 덧붙인 의미들에 밀려 역사적 사실 그 자체는 더 이상 중요하게 되지 않고, 종내에는 해석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지고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존넨알레(태양의 거리)>, <굿바이 레닌> 등의 영화는 무너진 동독체제의 일상을 다루면서 아이러니와 과장 등 희극적 요소들에 기대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에 반하여 곧 개봉될 영화 <타인의 삶>은 감상적인 과거회상이나 냉소적 감정, 과장된 코믹 등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금까지 독일에서만 1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30개 나라에 팔려나간 이 영화는 지난 2월25일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수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받았다.

독일의 플로리안 헹켈 폰 돈너스마르크(32)는 동독체제를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신예감독 이며, 이 작품은 그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하다. 극적인 과장없이 1989년 무너져 내린 한 체제의 단면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영화는 한 체제가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보통의 시민들에게 조직적으로 가하는 위협, 불안감 조성, 괴롭힘, 고문 등의 억압체제를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차분히 보여준다.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영화는 과거 국가안전부 감옥, 국가안전부 본청, 장관이 타던 볼보 리무진, 도청에 사용되는 기술과 장비들까지 원형대로 드러냄으로써 그 사실성을 강조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래 맞아! 그랬었지”라며, 잊고 지내던 과거의 기억을 현실로 끌어내는 작용을 한다. 동시에 중산층의 안정된 생활도, 아름다운 연인도, 또 대중들의 환호도 모두 체제가 허락하는 한에서만 허용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 인기 연극작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고 있는 게오르그 드라이만(세바스치안 코흐)과 사생활도 취미도 없이 오로지 당 노선만 철저히 따르는 국가안전요원 게르트 비즐러(울리히 뮈에). 1994년, 그러니까 독일이 통일되기 5년 전, 문화부 장관은 지금까지 당 노선에 충실하고 사회주의적 신념에 찬 작가인 게오르그 드라이만을 감시하라고 국가안전부에 지시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시인은 영혼의 기관사”라고 치켜세우지만, 다른 한편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한 번 정권에 찍힌 반체제 인사는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인물이다. 곧 극작가의 모든 벽에는 도청장치가 설치되며, 건물의 빈 천정 방에서 외롭게 도청 수신기를 귀에 댄 채 국가안전요원 비즐러는 자신의 희생물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감시에 들어간다. 감시대상자의 의심가는 모든 움직임을 세밀하게 적어나가는 충성스런 권력의 하수인.


하지만 절대권력을 쥔 명령권자가 미처 계산 못했던 한 가지가 있었으니, 인간이란 존재의 변화 가능성이었다. 맹목의 당성과 충성심으로 무장된 조직원이지만, 극작가가 자신의 여인을 위해 들려주는 베토벤의 아파시오나타 연주를 홀로 천장 방에서 훔쳐들으며 국가안전요원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떨어뜨린다.

그가 외롭게 자신의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몰래 뽑아온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삶” 속에 스며들게 된다. 그가 읽은 싯구는 이런 것이었다. “푸른 달이 떠있던 9월의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밑에서 가만히/ 고요하고 창백한 사랑, 그녀를/ 마치 아름다운 꿈처럼 내 팔로 껴안고 있네/ 또 우리들 머리 위에는 아름다운 여름 하늘/ 내가 오랫동안 지켜본 구름 한 조각/ 그것은 무척 희고 또 높았다/ 내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자, 이미 그것은 사라진 뒤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마리 A.에 대한 기억’의 첫 소절)

영화는 비록 감시자와 감시당하는 사람의 세계가 너무도 다른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두 세계가 소통이 불가능할 만큼 완벽히 다른 세계는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은 그들 모두는 독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미래를 확신하던 철저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 두 세계 간의 숨바꼭질 속에서 한 세계는 점차 다른 세계에 의해 침윤되고 변화한다. 감시대상자들이 나누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와 그들의 자유로운 예술관, 그들끼리 나누는 사랑과 갈등을 관찰하면서 급기야는 감시자 자신마저도 변할 수 있음을 명령권자는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안보 명분으로 가해지는 억압체제를
감시자와 피감시자 눈으로 차분히 응시
미·유럽 영화상 휩쓸고도 정작 독일선 찬밥
자신들 이야기 정당한 평가, 이처럼 어려운가

지금까지 별 의심받을 일 없이 충성스러웠던 극작가를 감시하는 이유가 사실은 문화부 장관이 이 작가와 함께 살고있는 여배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임을 감지한 국가안전요원은 자신의 의무와 도덕적 감정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자유와 배반, 예술과 정치, 삶과 죽음, 의무와 도덕적 갈등 사이를 오가며, 카메라는 이러한 인간 변화의 과정을 연기자의 탁월한 연기력에 기대어 냉정하고도 끈기있게 추적한다. 감시자는 자신의 감시대상자들이 동독의 절망적 현실에 대하여 서방언론에 고발하려는 음모를 진행시킴에도 이를 방조한 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다. 이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비도덕적 현실에 대한 인간적 표현이었다. 비로소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즈음부터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위치가 뒤바뀌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감시대상자들은 자신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의 배경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공화국은 종말을 맞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시민들이 자신과 관련된 국가안전부 감시문서를 열람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기를 둘러싼 사건들의 전말을 파악하게 된 우리의 영웅 드라이만. 영화의 결말은 결국 인간의 선의가 승리하고, 그 승전물로서 자유를 얻지만, 그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매우 큼을 보여준다.

개인의 기억, 사회의 기억

체제를 무너뜨린 1989년 유럽의 시민혁명은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삶까지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을까? 영화는 결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가해자는 가해자로 군림하며 체제의 시스템 속을 박혀 말단의 작은 바퀴역할을 하던 하수인은 여전히 희생자일 뿐이 없다. 구체제하의 문화부 장관은 이제 독일 연방공화국의 바뀐 체제하에서도 옛 사회주의 동지들의 표에 힘입어 국회의원으로 행세하지만, 사건 이후 강등되어 국가안전부 지하에서 증기로 편지봉투나 개봉하던 국가안전요원은 통일 후 기껏해야 지상으로 나와 광고 전단지 배달부로 지난한 삶을 연장시켜 나갈 뿐이다.

부분적으로 이 영화는 작품에서 국가안전요원 비즐로역을 했던 울리히 뮈에(52) 자신의 실제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독출신의 배우인 그는 통일 후에야 비로서 실재로 역시 배우였던 자신의 이혼한 부인이 “비공식 국가안전부 정보원”(IM)으로 동독정권을 위해 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사회주의 체제아래서 국가안전요원의 존재란 그저 받아들여야 할 일상의 일부였던 것이다.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70년대 말 우리네 대학 안에서는 관할 경찰서 형사와 그 푸락치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심지어는 학생들 중 누가 경찰서에 정보를 주는가를 알고 있었지만 그 또한 대학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불편도 오래 겪고나면 무감각해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개인사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객관성과 정확성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가들의 서술은 냉정하다. 증거물과 사료를 바탕한 서술 속에는 한 개인이 부당한 체제 속에서 겪어야 하는 삶의 불안함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감정이 서술될 여지가 없다. 역사가들은 그런 식으로 망각에 기여한다. 그것은 동시에 언어가 갖고 있는 한계이기도 하다. 1945년 이후 나치 독재와 유대인 학살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정작 일반인들에 다가가 그 실체를 알리고 그들을 감동시킨 것은 1978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홀로코스트”라는 텔레비전 시리즈물이었다. 유사하게도 독일 통일 이후 지금까지 독일 사회주의 정권과 그 비밀 정보체제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나오고 있지만 그 체제 안에 살던 사람들의 삶의 실체에 대하여 이처럼 전반적인 동의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비로소 이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이다.

바르게 기억하기의 어려움

통일 16년. 무너진 체제의 내부를 조용히 응시하며 그 사회를 무너트렸던 핵심적 문제들과 조용히 마주대하기 위하여는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동시에 시간은 그 시대가 갖았던 고통과 절망마저 풍화시킨다. 시간은 그 내면에서 무언가를 응고시키지만, 동시에 표면의 많은 것들을 휘발시킨다. 시간은 그 아픔과 함께 그 아픔에 대한 기억마저도 함께 앗아간다.

그런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영화가 던지는 역사해석의 문제점도 만만치 않다. 국가안전부가 보기 싫은 연적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투쟁도구로 사용(私用)되었다면, 거미줄 같은 감시망과 이에 동원된 자발적, 비자발적 국가안전요원들이 기껏해야 남녀관계에 얽힌 권력자의 자의적 지휘체제 아래 조종된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오히려 국가안전부를 무능하고 무해한 존재로 무장해제 시키고, 나아가 체제 전체를 미화시키는 일일 수 있다. 또한 그 소재가 무엇이든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기댄 영화는 희망적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미 무너져 내린 독재체제의 척추역할을 했던 바로 그 조직에서 그런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했던 시도는 온당한 일이었을까? 이는 국가안보의 이름 하에 어이없이 삶을 빼앗기고 고통당한 수 많은 체제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은 아닐까?
이진일/튀빙겐대 역사학 박사·성균관대 강사
이진일/튀빙겐대 역사학 박사·성균관대 강사

실제로 영화 제작진이 국가안전부 감옥을 촬영하고자 했을 때, 지금은 기념관이 된 한 감옥의 관리자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에 따르면 현실에선 존재하지도 않던 그런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 과거 국가안전부 감옥이 오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만들어진 후 아카데미상 뿐 아니라 유럽의 각종 영화상을 휩쓴 이 작품이 정작 독일의 대표적 국제 영화제인 베를리날레에서는 경쟁부문 후보에도 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정당하게 평가하기란 이처럼 어려운 것인가? 이진일/튀빙겐대 역사학 박사·성균관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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