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에 사는 채근옥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4월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1950년 4월부터 하루도 빠짐없는 금전출납부
인민위원회비, 정자 고무신, 빤스 고무줄…
앨범 속 사진보듯 되살아나는 그날의 기억들
사소한 개인사 속에 거대 역사 흐름도 알알이
블로그 편리하지만 ‘펌글’만 채우면 뭐에 쓰랴
인민위원회비, 정자 고무신, 빤스 고무줄…
앨범 속 사진보듯 되살아나는 그날의 기억들
사소한 개인사 속에 거대 역사 흐름도 알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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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누의 인물로 세상읽기/57년째 일기 쓰는 해남의 채근옥씨
십여 년 전, 서울에서 전남 해남을 가려면 지레 주눅이 들곤 했다. 너무 먼 탓이었다. 여섯 시간은 기본이었고 쉬엄쉬엄 가다 보면 여덟 시간은 족히 걸리고도 남았으니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그 때문인가. 전국을 마다 않고 싸돌아 다녔지만 유독 해남이나 진도와 같은 곳들에는 걸음을 자주 나누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남에 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유혹이 내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한사코 일기라고 말하던 그
그 유혹은 50여년이나 묵은 낡아빠진 일기장이었다. 어찌 보면 하찮게 여길 수도 있는 그것 하나 보려고 새벽 4시에 길을 나서서 해남에 닿은 것이 점심 무렵이었었다. 마을 구멍가게에서 마실 것을 사 들고 대뜸 일기장의 주인인 채근옥씨의 집으로 찾아들었다. 그이는 막 점심상을 물릴 참이었지만 하필이면 밥 때에 찾아든 손님인지라 먹던 밥상에 밥과 숟가락만 보태도 되겠느냐고 물어 왔다. 물론 개의치 않았으며 헤픈 웃음을 지으며 밥을 두 그릇이나 뚝딱 해치웠다. 본디 나는 적은 양을 먹지만 시골 어른들 앞에서는 딴 사람처럼 달라진다. 어디를 가든지 어르신들이 차려 주는 밥상은 무조건 두 그릇이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적어도 내 경험에 따르면 곧 쌀이 떨어질 지경이라도 자신이 차려 준 밥상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사람들을 보고 타박을 할 어르신들은 아직 이 땅에 없다. 오히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맛나게 밥상을 설거지하듯 먹어치우고 나면 부쩍 가까운 사이가 되고 마니 신기한 일이다. 밥상을 들어 부엌에까지 물리고 난 다음 마루에 앉으니 눈에 차는 것은 낡은 앉은뱅이 책상이었다.
굳이 채근옥씨에게 묻지 않더라도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꽂혀 있는 낡은 공책이 그이가 5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 온 일기장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떤 것은 헤져서 너덜거리고 또 다른 것은 큰 공책이 아까워 반으로 쪼개 놓아서 손바닥만한 것도 있었다. 언제부터 썼느냐고 물으니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이라고 하며 손에 닿는 대로 서너 권을 집어 펼쳐 보였다. 나는 일기장이라고 하기에 집안의 자질구레한 혹은 일기장의 주인공인 채근옥씨의 사소한 일상들이 씌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이가 펼쳐 보인 그것은 오히려 가계부라고 하는 것이 옳을 정도였다. 일기라는 것이 담보하고 있는 개인의 사적인 경험에 대한 기록이나 그 일에 대한 반성 혹은 미래에 대한 꿈이나 희망과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그날그날의 금전출납에 대한 기록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이는 나와 의견이 달랐다. 그이는 한사코 그것이 일기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특이한, 가령 인민위원회 비용이라든가 여성동맹회비 혹은 정자 고무신, ‘빤쓰’ 고무와 같은 것들이 쓰인 날짜를 내가 짚으면 그이는 그날의 일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그것은 마치 비디오와 사진의 차이 같았다. 누구나의 집에 있을 법한 비디오와 가족 앨범의 차이 말이다. 전에도 한 번 쯤 이야기한 것 같지만 그것의 차이는 너무도 극명하다. 가령 회갑잔치를 비디오로 기록해 둔 것과 사진으로만 찍어 둔 것의 차이는 보관하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들춰 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그날의 일을 되새기며 비디오를 틀면 누구라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 만다. 어느 한 순간 떠들어도 잠시 뿐 이내 조용히 화면만 바라보는 것이다. 화면에서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설명할 것도 없이 저 혼자 알아서 모습도 보여주고 말까지도 하니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 찍은 사진을 모아둔 앨범을 펼치면 서로 맞대고 둘러앉아 이게 누구고 저게 누구고, 이때는 어땠고 저때는 어쨌고 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마도 앨범을 말없이 들여다 보기만한 추억을 가진 이는 드물 것이다.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포기하랴
그이는 내가 가리키는 날의 기록에 대해 드물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했지만 대개는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일기장이라고 하는 그것을 펴 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마치 앨범을 펼쳐 놓고 같이 보는 것과도 같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형식으로 보자면 그것은 분명 금전출납부 혹은 가계부였지만 그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한 줄의 기록이 모티브가 되어 일기장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록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전체를 모두 빼곡하게 써 놓지 않아도 그것이 때로는 전체로 살아나기도 하는 것이다. 내 당대의 기억을 후대의 누군가가 대물림으로 살을 붙이고 또 그것을 대물려 가꾸고 사실을 덧붙여 풍성해지는 것 또한 기록의 묘미이다. 내 당대에 내 손으로 직접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예 포기하는 것은 섣부른 것이지 않겠는가. 전부가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살면서 어찌 그날의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 정확만 하다면 한 두 줄 일 뿐일지라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보면 더없이 훌륭한 가치를 지닌 것이 되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처럼 세상의 모든 기록은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이 없는 법이다. 그이는 요즈음은 잘 쓰지도 않는 G펜이라고 하는 펜으로 잉크를 묻혀가며 일기를 썼다고 했다. 그것도 잉크 살 돈이 아까워 잉크병에 물을 타는 것은 물론 들기름 몇 방울까지 떨어뜨렸다고도 했다. 그렇게 하면 잉크를 좀 더 오래 쓸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가. 일기장의 글씨들은 맨 잉크로 쓴 것들 보다 좀 더 많이 번져 보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그 일기장을 들춰 보고 있는데 안주인이 한마디 거든다. “아따, 저것이 징한 것이여, 내가 저것 땜시 얼매나 욕을 봤겠소. 보기만혀도 징글징글 맞소”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내가 이 집으로 시집을 안 왔소. 그때부텀 지금까정 저거를 끌어안고는 나를 못살게 해샀는디, 장에 가도 영수증 쪼가리 안 받아 온다고 잔소리를 해대는데, 아이, 선상님도 생각해보믄 알 거 아니오. 장에 있는 할마이들이 영수증 주는 것 본 적 있소. 안 그라요. 그라이 내가 그걸 전부 써 갖고 와야 허는디,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내가 글을 모린다 말이오, 그 땜시 인자는 내가 장에도 안 가, 영감보고 갔다 오라고 하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것이 징한 것이여” 안주인 푸념
하긴 그도 그럴 법했겠다. 3년 전, 40~50대 주부들과 함께 이 어르신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가기 전에 미리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한결같은 반응이 그 영감 꼬장꼬장할 텐데 그이와 같이 사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이 덕에 1950년의 해남 땅이 며칟날은 인민군 땅이 되었다가 또 며칟날은 국방군 땅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으니 개인의 기록이 곧 현대사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으며 물가 변동과 화폐가치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어 무척 고마운 것이기도 했다.
즉, 지극히 소박한 개인생활사로부터 사회변동과 흐름을 유추해나가는 미시사로부터 거시사의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 또한 2002년부터 일기를 써 오고 있다. 제목을 조선후기 북학파의 일원인 형암(炯庵) 이덕무의 그것을 본 떠 <관독일기(觀讀日記)>라 거창하게 붙이고 해마다 음력 9월9일인 중양부터 시작해 90일 동안만 쓴 것이다. 몇 권 되지는 않지만 어느덧 해가 거듭되어 묵은 것을 꺼내 보면 당시 나의 모습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거나 그날 읽었던 책들 속에서 간추려 놓은 짧은 문장들이 주는 감흥이 새로움을 느낀다.
그처럼 세상의 모든 일기는 개인에게는 사소한 일상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무한한 변신을 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닌 것이다. 채근옥씨처럼 가계부이면 어떻고 문장력이 딸리면 또 어떤가. 매일 매일을 기록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요즈음 새롭게 등장한 블로그라는 매체에 마음껏 써 올리면 그 모든 것이 소중한 것이지 싶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블로그의 그 수많은 글들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무작정 옮겨 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개인 관심사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남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편승하기보다 단 한 줄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남겨 놓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지 않겠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각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사회야말로 다양성이 담보된 흥미로우며 건강한 모습의 사회일 테니까 말이다.
이지누/글쓰는 사진가
굳이 채근옥씨에게 묻지 않더라도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꽂혀 있는 낡은 공책이 그이가 5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 온 일기장이라는 것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어떤 것은 헤져서 너덜거리고 또 다른 것은 큰 공책이 아까워 반으로 쪼개 놓아서 손바닥만한 것도 있었다. 언제부터 썼느냐고 물으니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이라고 하며 손에 닿는 대로 서너 권을 집어 펼쳐 보였다. 나는 일기장이라고 하기에 집안의 자질구레한 혹은 일기장의 주인공인 채근옥씨의 사소한 일상들이 씌어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이가 펼쳐 보인 그것은 오히려 가계부라고 하는 것이 옳을 정도였다. 일기라는 것이 담보하고 있는 개인의 사적인 경험에 대한 기록이나 그 일에 대한 반성 혹은 미래에 대한 꿈이나 희망과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고 오로지 그날그날의 금전출납에 대한 기록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이는 나와 의견이 달랐다. 그이는 한사코 그것이 일기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특이한, 가령 인민위원회 비용이라든가 여성동맹회비 혹은 정자 고무신, ‘빤쓰’ 고무와 같은 것들이 쓰인 날짜를 내가 짚으면 그이는 그날의 일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그것은 마치 비디오와 사진의 차이 같았다. 누구나의 집에 있을 법한 비디오와 가족 앨범의 차이 말이다. 전에도 한 번 쯤 이야기한 것 같지만 그것의 차이는 너무도 극명하다. 가령 회갑잔치를 비디오로 기록해 둔 것과 사진으로만 찍어 둔 것의 차이는 보관하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들춰 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그날의 일을 되새기며 비디오를 틀면 누구라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 만다. 어느 한 순간 떠들어도 잠시 뿐 이내 조용히 화면만 바라보는 것이다. 화면에서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에게 설명할 것도 없이 저 혼자 알아서 모습도 보여주고 말까지도 하니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 찍은 사진을 모아둔 앨범을 펼치면 서로 맞대고 둘러앉아 이게 누구고 저게 누구고, 이때는 어땠고 저때는 어쨌고 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마도 앨범을 말없이 들여다 보기만한 추억을 가진 이는 드물 것이다.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포기하랴
그이가 고무신을 사 준 정자는 큰 딸이며 ‘빤쓰 고무줄’은 누구의 것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지누/글쓰는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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