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8일부터 9월3일까지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길 갤러리에서 열린 추모전 ‘이우영 1972~2023: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에 걸린 사진. 이우영 작가가 자신의 집 벽지에 그린 그림이다. 서정민 기자
전등불 스위치 위에서 뛰노는 기영이와 기철이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만화 ‘검정고무신’의 이우영 작가가 자신의 집 벽지에 그린 그림이다. 그에게 기영이와 기철이는 자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한순간 잘못 맺은 저작권 계약 탓에 기영이·기철이 그림을 더는 그릴 수 없게 됐다. 자식을 잃은 듯한 슬픔에 괴로워하던 그는 끝내 세상을 등졌다. 지난 3월11일의 일이다.
벽지 그림은 사진이 되어 전시장 벽에 내걸렸다. 지난달 18일부터 지난 3일까지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길 갤러리에서 열린 추모전 ‘이우영 1972~2023: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에서다. 전시장에는 ‘검정고무신’ 원화와 만화책뿐 아니라 고인의 삶을 담은 글, 그림, 사진, 인터뷰 영상 등이 펼쳐졌다. 전시회를 주최한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의 김솔지 큐레이터는 “이우영 작가에게 ‘검정고무신’은 삶 그 자체였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31일 전시장을 찾은 이지수(31)·조슬기(31) 부부는 “어릴 적 ‘검정고무신’ 애니메이션을 즐겨 봤는데, 작가님이 너무 황망히 세상을 떠나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전시회를 공동 주최한 노원문화재단 관계자는 “8월31일 기준으로 3168명이 전시장을 찾았다. 전화 문의도 끊이지 않는 등 여느 때보다 반응이 뜨거웠다”고 전했다.
‘이우영 1972~2023: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 전시회를 관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이 작가 유가족은 얼마 전 축하 전화를 여러 통 받았다. 한국저작권위원회가 지난달 14일 ‘검정고무신’ 캐릭터 9종에 대한 저작자 등록 직권말소 처분을 최종 확정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다. 이들 캐릭터는 이 작가가 창작했으나, 2008년부터 이 작가와 그의 동생 이우진 작가, ‘검정고무신’ 스토리를 담당한 이영일 작가, 캐릭터 회사 형설앤의 장진혁 대표 등 4명이 공동저작자로 이름을 올려왔다. 이에 대해 저작권위가 실제 창작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저작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며 기존 저작자 등록을 직권으로 말소한 것이다. 언론은 “기영이·기철이가 이우영 작가 품으로 돌아왔다”고 보도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다. 많은 이들은 “뒤늦게나마 문제가 해결돼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기영이·기철이의 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저작자 등록 직권말소와는 별도로 형설앤 장 대표와 이 작가 사이의 법적 다툼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우영작가사건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은 박광철 한국만화가협회 이사는 “저작권위가 창작자만 저작자로 인정한 것은 의미 있는 결정이지만, 그렇다고 사건이 해결된 건 결코 아니다. 장 대표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 작가 쪽이 지면 유가족이 수억원의 돈을 물어내고 거리로 나앉을 판이다”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18일 ‘이우영 1972~2023: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 전시회 개막식에서 이우영 작가 부인 이지현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 제공
발단은 20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 대표는 이 작가 형제에게 접근해 ‘검정고무신’ 캐릭터로 다양한 사업을 벌여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제안하며 사업권 설정 계약을 맺었다. 사업을 하려면 캐릭터에 대한 지분이 필요하다며 자신을 공동저작자로 등록하기도 했다. 박광철 이사는 “이 작가는 포괄적인 사업권을 모두 넘기는 불공정 계약인 줄도 모르고 사인했다. 이를 뒤늦게 알고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우영의 우를 ‘어리석을 우’(愚)로 실제 개명까지 했을 정도로 자책했다”고 전했다.
잘못 서명한 대가는 가혹했다. 장 대표는 2019년 이 작가를 상대로 3억7천만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작가의 부모님 농장에서 ‘검정고무신’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자신의 허락 없이 이 작가가 ‘검정고무신’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와 웹툰을 그렸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양쪽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면서 1심 판결은 한없이 늦춰졌고, 그 과정에서 고통받던 이 작가는 삶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 작가 쪽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세종의 임상혁 변호사는 “불공정 계약일지라도 그 효력을 인정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설혹 인정한다 해도 그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관건이다. 우선 10월 중순께로 예상되는 1심 판결이 분수령”이라고 말했다. 이우영작가사건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맡은 김성주 변호사는 “이 사건에도 과연 ‘계약 자유의 원칙’을 우선 적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업자와 작가 간 ‘계약 정보 불균형’ 문제로 작가가 잘 모르는 채 서명했기 때문이다”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이우영 1972~2023: 매일, 내 일 검정고무신’ 전시회에서 한 어린이 관객이 만화 채색 체험을 하고 있다. 홍우주사회적협동조합 제공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지와 함께 ‘제2의 검정고무신’ 사태를 막는 것 또한 중요하다. 현재 저작권법 개정안, 문화산업 공정유통법 등이 발의돼 국회에 계류 중이다. 문체부는 만화·웹툰 분야 표준계약서를 전면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처럼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존에 만연한 계약 관행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성주 변호사는 “법·제도 개선만으로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는 어렵다. 작가는 전문가 도움을 얻어 불공정 요소는 없는지 철저히 검토하고, 사업자는 세부적인 내역과 조건을 투명하게 알리는 계약 문화가 정착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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