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 오장 송가·전두환 대통령 탄신 축시
언어를 부리는 만큼이나 능란한 정치적 자질
그럼에도 ‘미당 찬미’ 과잉 재생산
눈부신 5월 참회를 모르는 부끄러움이여
언어를 부리는 만큼이나 능란한 정치적 자질
그럼에도 ‘미당 찬미’ 과잉 재생산
눈부신 5월 참회를 모르는 부끄러움이여
자운영 꽃밭에 오래 앉아 있었다. 말간 물로 쌀랑쌀랑 핏기를 씻은 후 얼른 건져 흩뿌려놓은 듯한 연보랏빛 작은 꽃들. 연한 핏방울을 점묘로 가득 지펴놓은 듯한 5월 들녘에 앉아 하필이면 이런 기사를 읽게 된 날이었다. 기사가 전해준 상황은 이렇다.
동국대 중앙도서관 내 국보급 도서 보관실인 ‘귀중본실’에서 꺼내온 상자가 본관에 도착한다. 총장이 조심스레 나무상자를 연다. ‘동국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1996년 5월에 미당 서정주’라고 쓰인 원고가 나온다. 2000년 타계한 미당이 미리 써놓은, 모교 개교 100년사를 한국현대사 100년과 함께 서술한 축시라 한다. 축시를 미리 받은 학교 측은 이 축시를 곧바로 금고에 모셨고 10년 후인 2006년 5월1일 개교 100주년을 맞아 개봉한 것이다. 이 시는 교내에 전시되다가 다시 금고에 보관되어 올 가을께 타임캡슐에 들어간단다. 타임캡슐은 100년 뒤 열 계획이라고 한다.
고백하자면, 이 기사를 읽는 내내 한 편의 허망한 촌극을 보는 듯했다. 모교 출신의 문인을 귀하게 대접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미당의 축시가 무슨 국보급 문서 다뤄지듯 하는 사태는 좀 민망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문인에게 진정한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 과잉된 ‘받들어 모심’이 생전에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를 끝내 풀지 못하고 타계한 미당에게 오히려 욕된 것은 아닐까.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행위가 그러하듯, 시인은 자신이 감당한 세계만큼만 시인일 뿐이다. 미당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한국 현대시의 진수에 닿을 수 없다는 투의 절대화된 과잉평가는 그만큼의 회의를 동시에 깊게 만들 터이다.
미당의 문학적 업적을 존경하는 이들은 미당이 남긴 ‘어떤’ 시편들에 대해 ‘잡시’로 괄호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시/문학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 안 되는 그런 ‘잡시’들을 문제삼아 미당의 문학적 업적이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보호기제가 작동하는 셈이다. 이러한 ‘잡시’들 속엔 ‘마쓰이 오장 송가’를 포함한 일제시대의 친일시들과 ‘전두환 대통령 탄신 58회 축시’ 같은 친정치권력적 시도 포함될 것이다. 시를 쓰다 보면 좋은 시를 얻을 때도 있고 놓칠 때도 있지만 모든 시인들이 언제나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분투하듯이, 애초에 ‘잡시’로 치부할 수 있는 시란 없다. 만약 문학적 수준이 떨어지는 잡스러운 것을 시라는 형식으로 남발했다면, 그 역시 시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그의 시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당의 친일시편들은 일제 식민지라는 우리 역사의 특수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마땅하지만, 후일 미당이 술회하듯 ‘살기 위해 친일했다’는 변명은 옹색하고 슬프기 짝이 없다. 지금의 문학독자는 식민지 현실의 암묵적 강요에 의해 한두 편의 시나 산문을 남긴 문인들까지 친일문학가의 이름으로 폄훼하지 않는다. 정지용이나 이용악을 친일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당의 변명처럼 그 시대, 윤동주나 이육사처럼 정말 ‘살지 못하고’ 옥사한 이들도 있었지만 조지훈 박목월 황순원 김영랑 신석정 박두진 변영로 등 한줄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고 ‘살아남은’ 문인들 역시 많다. 내면적인 자발성 없이 시를 포함하여 소설 수필 평론 르포에 이르기까지 10편이 넘는 친일작품을 쓰고 발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 괴로워서라도 그리 안 될 것이며,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이미 ‘시인’의 마음을 잃었다는 얘기와도 통하는 말일 터이다.
일본이 그렇게 쉽게 망할 줄 몰랐다는, 못 가도 몇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훗날 미당의 술회를 정세파악에 무지한 무정치성의 천진함으로 해석하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 종천순일파라 칭하며 친일도 부일도 아닌 다만 하늘의 순리에 따랐다고 말하는 미당에게서 나는 고도로 능란하게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자질만큼이나 능란한 정치적 자질을 느낀다. 자신의 족적에 대한 반성을 기피해온 명민한 자기합리화와 무책임한 변명, 그리고 친권력적 속성이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로 시작하여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로 끝나는, 87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찬양한 송시를 또다시 바치게 했을 것이다. 설령 이러한 행보가 정말로 천진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식민지와 독재라는 참혹한 파시즘의 광풍을 거쳐온 한국사 속에서 이토록 ‘천진한(!)’ 고뇌 없음은 시인에게 오히려 욕된 것이 아니었을까. 미당이 손쉽게 도피하곤 했던 ‘하늘’이 보시기에 어쩌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니었을까.
언어를 부리는 기술이 탁월하고 시풍 또한 도드라진 것이 분명하지만, 미당에게는 미당만큼의 자리가 존재하면 될 뿐, 여러 종류의 지나친 극칭으로 수사되며 끊임없이 과잉 재생산되는 사부가는 이제 그만 지양되어도 좋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공개된 축시 속에는 4·19 얘기도 나오고 민족의 ‘정의’ 얘기도 나온다.
그가 이 축시를 쓰던 그 5월쯤에라도 진심을 담은 참회를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말의 맛을 아는 유려한 시어로 일제와 5월 광주의 학살자에게 바친 송시를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참회의 시를 남겨주었다면 우리 문학사는 한결 높은 ‘격’과 풍성한 표정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자운영 꽃밭 얘길 마저 하자. 삶의 현장인 논밭을 미학적 공간으로 수놓은 자운영 꽃밭은 파종기에 갈아엎어져 그 자리에서 거름으로 돌아간다. 거름꽃이기도 한 자그맣고 어여쁜 자운영 꽃들은 흙을 비옥하게 하고 그 흙에서 다시 태어난다. 문학과 삶의 관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눈부시게 아픈 5월, 참회를 모르는 부끄러움이 자꾸 망각된다면, 삶의 자리처럼 문학의 자리도 갈수록 팍팍해질 것이다.
김선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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