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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제주

세 자매의 4·3…임신한 엄마 고문한 경찰, 큰형부도 지하실로

등록 2023-04-03 10:00수정 2023-04-03 22:13

[제주4·3 그 뒤, 75년] 하도리 세 자매의 연좌제
아버지 항일, 4·3, 도피, 밀항…파란만장 삶
제주에 남겨진 가족은 간첩사건 때마다 공포
40여년 전 오기숙씨의 남편이 심은 팽나무 앞에서 선 세 자매. 오기숙, 오희숙, 오계숙씨. 허호준 기자
40여년 전 오기숙씨의 남편이 심은 팽나무 앞에서 선 세 자매. 오기숙, 오희숙, 오계숙씨. 허호준 기자

어머니는 바다에 가면 시름을 잊었다. 토끼섬 넘어 아스라이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지난날들을 자맥질했다. 세 자매도 어머니를 따라 바다로 갔다. 바다를 보면 속이 후련했다.

지난달 19일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서 만난 오희숙(87)·계숙(80)·기숙(78) 자매는 신산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울고 웃었다. 어릴 때 세 자매는 어머니와 함께 모두 물질을 했다. 첫째는 2년 전 은퇴했지만 셋째는 현역 해녀다. 제주시내에 사는 둘째는 일찍 해녀를 그만뒀다. 어머니와 세 자매는 일제강점기와 4·3을 거치면서 언제나 연좌제의 공포에 시달렸다.

아버지 오화국의 삶은 가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와 4·3을 거치면서 이어진 시련은 자매들의 남편에게까지 이어졌다. 취직할 수 없었고, 간첩사건이 터질 때는 장모와 함께 끌려가 고문을 받는 등 연좌제에 시달렸다. 그렇게 마음 졸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아버지는 17살 나던 1930년 4월 당시 제주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인 제주농업학교에 진학했다. 독자였던 할아버지는 자식 열둘을 낳았지만 한집(홍역)에 걸려 잇따라 숨졌고, 겨우 아버지를 건졌다. 그 귀한 아버지가 농업학교에 진학하자 할머니는 하도리에서 양식을 짊어지고 성안(제주시내)까지 걸어갔다. 새벽에 집을 나서면 어두워지는 거리였다. 그렇게 키운 자식이었다.

1931년 3월 학교 쪽의 부당한 학사 운영에 분노한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 사택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이 사건에 연루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학생들은 유치장에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해 8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됐지만, 이 일로 아버지는 제적됐다. 고향 하도리로 돌아왔다.

아버지 오화국 선생의 1948년 3월 가석방증. 허호준 기자
아버지 오화국 선생의 1948년 3월 가석방증. 허호준 기자

아버지는 이듬해 1월 하도리를 중심으로 구좌면 해녀들이 일제의 착취에 맞섰던 해녀투쟁에도 가담했다. 그러다 그해 2월 구좌면 일대에 살포된 ‘격문’ 때문에 세화주재소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해방을 맞았다. 아버지는 해녀투쟁을 지도했던 이 지역 문도배, 오문규 등과 함께 청년운동에 뛰어들어 야학 활동을 하며 마을 청년들을 가르쳤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는 아버지와 집안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다. 제주읍은 물론 도내 면별로 수천명씩 모여 기념행사가 열렸다. 아버지는 동료들과 함께 이날 오전 구좌면 세화교에서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기념대회를 이끌었다. 둘째는 “이모가 ‘느네 아방이 요망졌져’(네 아버지가 똑똑했어)라고 얘기해줬다”며 “두루마기를 입고 기념행사에 참석해서 연설문도 낭독했다고 하더라”고 했다.

제주읍 제주북교에서 열린 기념대회에서는 대회가 끝난 직후 경찰의 발포로 시위를 구경하던 주민 6명이 숨지고 여러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경찰은 발포 책임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정당방위’라며 다른 지방에서 경찰을 증파받아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같은 해 5월6일까지 이 사건으로 사법처리된 인원만 368명에 이르렀다.

할머니·할아버지 세워두고 공포탄 위협

아버지도 그해 5월 하순 집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하도교 2학년이던 첫째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집 뒤는 대나무밭이었지만, 갑자기 경찰이 오니까 뛸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잡혀갔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미군정 포고 2호 등 위반으로 징역 10개월형을 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면회하러 부지런히 목포를 다녔고, 그 덕인지 8개월 만에 가석방됐다.

1948년 4월1일,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무장봉기 발발 이틀 전이었다. 첫째와 둘째는 아버지가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저녁이었어요. 아버지와 같이 저녁 먹고, 그날 밤을 보냈는데 다음날 밝으니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잡혀갔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아버지도 여기 있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어요. 하룻저녁 자고 떠난 겁니다.”

첫째 오희숙씨. 허호준 기자
첫째 오희숙씨. 허호준 기자

그 뒤로 아버지는 제주 땅을 밟지 못했다. 이튿날 바닷길이 막혔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날들이 이어졌다. 갑자기 ‘빨갱이 가족’이 돼버렸다.

12살 희숙은 할아버지네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면 동생들을 돌봤다. 그러나 친구를 찾아가면 친구 부모들이 “물 붙는다”(나쁜 일에 연루된다), “너희들은 밖에 다니면 안 된다”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첫째는 “이웃집 삼촌(주민)들이 했던 ‘놀지 말아라,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셋째는 “우리를 ‘빨갱이 새끼’라고 하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경찰은 아버지가 부산으로 떠난 사실을 알면서도 수시로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아들을 찾아내라”고 닦달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세워놓고 위협하며 공포탄을 쏘는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녀들이 피해를 볼까 봐 “우리는 죽어도 좋지만 너희들은 살아야 한다”며 남의 집을 빌려 밤이면 그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도록 했다.

경찰이 찾아올 때마다 가족들은 두려워했고, 머리가 쭈뼛쭈뼛 섰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밭에서 거둬들인 메밀을 밤새 맷돌에 갈고, 할머니는 “잘 봐달라”며 그것을 경찰에게 갖고 갔다. 경찰이 탄 차가 보이면 겁부터 났다.

1948년 여름이 지날 무렵 바닷길이 잠깐 열렸다. 아버지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아들과 셋째 기숙을 데리고 물질 가는 배를 이용해 부산으로 갔다. 부산 영도에 셋방을 얻은 어머니는 그곳에서도 물질로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첫째와 둘째는 제주에 남아 할아버지가 경찰에게 당하는 수모와 고초를 고스란히 지켜봤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한국 땅에 발붙일 곳이 없었다. 제주로 가면 죽을 것이라 생각했고, 부산에서도 살 수가 없었다. 친척이 사는 일본으로 가려고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둘째 오계숙씨. 허호준 기자
둘째 오계숙씨. 허호준 기자

기약 없이 남편을 떠나보낸 어머니는 1950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기다린 건 경찰이었다. 경찰은 어머니를 잡아가 “남편이 어디 갔느냐”며 고문했다. 주전자로 코에 물을 들이붓고, 전기고문을 가했다.

둘째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모진 고문을 하던 경찰이 ‘홀몸이 아닌 것 같다’며 고문을 멈췄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고문당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막내를 임신하고 5개월 될 때였다. 때리지는 않았지만 옷을 벗겨서 거꾸로 달아매 얼굴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코에 물을 길었다”고 몸서리를 쳤다. 어머니는 2007년 세상을 떴다.

“취직할 수 없어 농사만 지었다”

연좌제는 자매의 남편한테까지 영향을 미쳤다. 1959년 결혼한 첫째는 “동갑내기 남편은 그 시절에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장인어른 때문에 취직할 수가 없어 처가에 와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셋째 오기숙씨. 허호준 기자
셋째 오기숙씨. 허호준 기자

셋째의 남편도 연좌제에 걸렸다. 셋째는 “군에서 제대한 남편이 1970년대 초에 외항선을 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소를 팔고 부산에 가서 요리를 배웠다. 배를 타려면 기술이 필요하다고 해서 배웠던 건데, 장인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하게 되자 제주로 돌아와 농사만 지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간첩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주목 대상이 됐다. 197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간첩사건에 연루돼 어머니와 첫째 사위가 경찰에 끌려갔다. 며칠 뒤에는 셋째도 세살 아들을 업은 채 연행됐다. 셋째는 “경찰서에 가니까 아기는 경찰이 어디론가 안아 데려가버리고 지하실에서는 취조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부가 내는 소리인지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도 들리고, 고문받는 소리가 지하실에서 들려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다. 장모와 사위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셋째는 경찰이 수십년 전 어릴 때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어 기가 막혔다고 했다.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한 경찰은 셋째를 당일 저녁 풀어줬다. 어머니와 형부는 이튿날 석방됐지만, 그 후로는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다. 자매는 “장인 때문에 사위들까지 연좌제 피해를 봤다. 우리하고 결혼하지 않았으면 고초를 겪지도, 불이익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세 자매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네와 어머니한테 평생 마음고생을 시킨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 아버지가 3·1절 기념대회와 관련해 형을 받은 사실이 인정돼 지난해 7월20일 4·3 희생자로 인정됐다.

“아버지의 처지가 애달프고 처량해요. 일제 때 항일운동한 기록이 있는데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4·3 희생자로 인정되니까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솟아납니다.”

세 자매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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