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28일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학살터. 4·3사건 당시 이곳은 산남(한라산 이남) 최대 학살터였다. 절벽 위에서 총을 맞은 주민들이 폭포 아래로 떨어졌다.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최소 255명이다. 김양진 기자
“아버지, 어머니. 바당에서 집에 와수다. 이제야 돌아와수다. 이제랑 편히 쉬십서. 죽어도 원이 어수다.”
29일 오전, 구름 사이로 잠깐 파란 하늘이 보이더니 이내 회색빛으로 뒤덮였다.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에는 새벽부터 보슬비가 내렸다. 정방폭포 절벽 위 키 큰 종가시나무와 녹나무, 먼나무 등이 어우러진 불로초공원 연못의 연꽃도 가늘게 내리는 비를 맞아 젖었다.
할머니부터 이름도 못 지은 동생까지 일가족 학살
공원 한쪽에 ‘정방 4·3 희생자 위령 공간’이 들어선 날. 아침 일찍 제막식을 찾은 남색 한복 차림의 김연옥(82)씨가 헌화 순서가 되자 애써 참아온 눈물보를 터뜨리며 울부짖었다.
29일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정방 4·3희생자 위령공간’ 제막식에 참석한 4·3 유족 김복순씨가 딸들과 함께 흐느끼고 있다. 허호준 기자
“주먹밥을 주니까 하나씩 먹고 잠이 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사람들이 창고 밖으로 끌려나가 있었어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빠 손을 잡고, 어머니는 남동생을 업은 채 나갔어요. 순간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았어요. 창고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아버지를 군인들이 강제로 끌어냈어요. 질질 끌려나가는 아버지에게 발길질과 몽둥이질이 쏟아지고, 울며불며 아버지를 따라 창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확 잡아챘어요. 담벼락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잃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 제 곁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어요.”
중산간인 안덕면 동광리 삼밭구석 마을에 살던 김씨 가족은 산에서 피신생활을 하다 토벌대에 붙잡혀 정방폭포 위 수용소로 쓰이는 창고로 끌려갔다.
1949년 1월22일, 8살 김씨는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정방폭포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그리고 이름도 짓지 못한 어린 남동생 등 모두 여섯명이 집단학살됐다. 그날 창고 담벼락에 내동댕이쳐진 김씨 머리에는 지금도 그 당시 움푹 팬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다.
29일 제주 서귀포시 동홍동 불로초공원에서 오영훈 제주지사와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방 4·3 희생자 위령공간’ 제막식이 열렸다. 허호준 기자
김씨의 트라우마는 깊고 깊다. 김씨는 그날 이후 지금껏 바닷고기를 먹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이 바다에 빠져서 시신도 못 찾았는데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없잖아요.” 이날 김씨가 불교에서 악업을 없애준다는 다라니를 위령제단에 올리자 다른 유족들도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가져올 텐데”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처형장 가면서 주먹밥, 무명 두루마기 건넨 부모님
충남 천안에 사는 김복순(87)씨도 이날 딸들과 함께 제막식장을 찾았다. 김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방폭포에서 희생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방폭포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김씨와 8살 남동생에게 주먹밥과 무명 두루마기를 건넸다.
“어디 가서 몸빼(일바지)라도 만들어달라고 해서 입어라”던 부모들의 마지막 말을 김씨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두루마기는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도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지어준 것이었다. 김씨는 “나는 (토벌대가) 부모님을 죽이는 것을 직접 봤다. 아무도 모른다. 하늘과 땅이 알고, 나만 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정방폭포 일대 서귀포 해안은 한라산 남쪽 지역을 일컫는 ‘산남지역’ 최대의 학살터였다. 4·3 시기 정방폭포에서 학살된 4·3 희생자는 최소한 255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89명의 주검은 찾지 못했다.
제주민예총이 2015년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4·3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4·3해원상생굿이 인근 서복전시관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기념공간 조성 여론이 만들어졌다. 기념공간은 4차례나 후보지가 변경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날 희생자들의 안식처를 찾게 됐다.
29일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위 ‘정방 4·3희생자 위령공간’ 제막식에 참석한 유족 김연옥씨가 흐느끼고 있다. 허호준 기자
오순명 정방4·3희생자유족회장은 “며칠 동안 제막식을 준비하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목이 쉬었다. 너무 고민해서 어젯밤에는 꿈도 꿨다”며 “유족들이 7년 동안의 소원이 이제야 이뤄져서 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 회장의 아버지는 정방폭포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갇힌 정방폭포 수용소로 가다가 토벌대에 희생됐다.
오 회장은 “그때 사람들(토벌대)도 인간인데 어떻게 사람을 총 쏘아 (정방폭포 밑으로) 떨어뜨렸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정방폭포에서 죽은 10살이 안 된 어린아이도 16명이나 된다. 도대체 그 아이들을 왜 죽였는지 통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올레길이 지나고 정방폭포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이 꼭 찾는 이곳에 4·3위령공간이 마련돼 이제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발돋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정방폭포에서 희생된 유족 40~50여명이 자리를 지켰다. 지나가던 국내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제막식이 열리는 내내 정방폭포 물소리는 더욱 세차게 유족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