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6월 제주도에서 경비대 11연대장을 비롯한 장교들과 미군 고문관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4·3이 발발한 때는 미군정기(1945년 9월8일~1948년 8월15일)다. 2003년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결론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당시 제주도에 다녀온 진압 주체들의 책임과 함께 미군정 당국과 미군사고문단에도 책임을 묻고 있다.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정부를 대표해 여러 차례 추념식에 참석해 국가폭력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또 다른 책임의 한 주체인 미국의 반응은 여전히 없다. 4·3 당시 미국이 생산한 각종 문서는 미국이 4·3의 진압 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했음을 보여준다.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딘 군정장관은 제주도 민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에게 ‘제주도 작전’이라는 제목의 전문(1948년 4월18일)을 보내 경비대(국군의 전신)를 작전통제하에 두고 진압작전에 사용하도록 했다. 열흘 뒤에는 주한미군사령부 작전참모부 슈 중령이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함께 있던 미 6사단 20연대장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이 내린 ‘경비대 즉각 활동 개시’ 등의 지침을 전달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미군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10일 총선거에서 제주도 내 2개 선거구의 투표가 참여자 과반 미달로 실패하자 미군정은 같은 달 중순께 브라운을 제주도 군·경을 통솔하는 진압 책임자(최고 지휘관)로 파견했다. 그의 파견은 한달여 전 ‘미군 개입 금지’를 지시한 하지 사령관의 명령과 배치됐다. 미군 대령이 진압 책임자로 나선 것은 제주도 사태에 대한 미군의 직접 개입을 의미한다. 당시 국내 신문들은 “하늘에는 미군 정찰기, 연안에는 미군함, 육상에서는 미군 지프가 질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주도에 배치된 미군 연락기. 미군이 조종한 이 연락기는 중산간에 피신한 주민들을 찾아내는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브라운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토벌작전을 강화했다. 경비대는 5월22일부터 6월30일까지 주민 5천여명을 검거했다. 신문들은 ‘제주도는 울음의 바다’라며 제주 상황을 전했다. 브라운 대령의 작전결과는 주한미군사령부 정치고문관을 통해 미 국무부에 보고됐는데, 엄격하게 비밀로 취급해야 하는 육군 문서 사본으로 국무부 안에서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회람하도록 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미국의 직간접적 개입을 보여주는 기록은 곳곳에 나타난다. 주한미사절단 특별대표 무초는 11월3일 국무부에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을 뿌리뽑지 못하는 (한국) 정부의 무능력으로 긴장감이 남아 있다”는 긴급전문을 보냈다. 뒤이어 11월17일 제주도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4·3 시기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주한미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이범석 국무총리에게 서한(1948년 9월29일)을 보내 “경비대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로버츠는 초토화 작전이 한창이던 같은 해 12월18일 국무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제주도 주둔 송요찬 9연대장을 “제주도민들의 적대적 태도를 우호적이고 협조적 태도로 바꾸는 데 상당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언론과 대통령의 성명을 통해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추천한다”고 했다. 이에 국방부 총참모장 채병덕은 사흘 뒤 로버츠에게 답신을 보내 “송 중령과 미 고문관이 힘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훌륭한 능력을 보여주었다”며 “로버츠의 건의에 따라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할 수 있도록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1949년 5월 제주도를 방문한 딘 군정장관(왼쪽)과 제주도 민정장관 맨스필드 중령.
주한미사절단 관리들은 로버츠에게 “제주도 (상황)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1949년 3월10일)고 했고, 다음날 로버츠는 “한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제주도 작전에 대한 강력한 서한을 보냈다”고 회신하는 등 의견을 조율했다. 이 과정에서 사절단 대표 무초 특사는 국무부에 “소련 에이전트(스파이)들이 큰 어려움 없이 제주도에 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전문(1949년 4월9일)을 보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무초는 같은 해 10월13일 “제주도 작전이 엄청나게 성공적이어서 공산폭도들이 어떤 방식으로도 회복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보고하게 돼 기쁘다”고 타전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미국 관리들은 제주도 사태의 전개에 관심을 가져 제주도를 시찰하고 경찰 내 미고문관의 배치, 정찰초소 설치와 즉각적인 공격을 건의했고, 상당 부분 수용됐다.
4·3 관련 석·박사 논문을 쓴 존 메릴 전 미국 국무부 동북아국장은 “4·3은 미국 역사상 잊히고 알려지지 않은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라며 “미군은 당시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8일 미국 워싱턴 우드로윌슨센터에서 ‘제주 4·3: 인권과 동맹’이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 허호준 기자
‘4·3’, 미국 사회 공론화 어떻게 하나
제주 4·3이 일어난 지 75년이 됐지만 미국 정부의 책임을 규명하는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진실을 밝히라는 목소리에도 미국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4·3 진상규명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자 당시 시민사회에서는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선언적 의미의 요구였고, 그 뒤 미군정이 생산한 많은 문서를 통해 미국의 역할 등 직간접적 개입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4·3 관련 단체들은 70주년을 맞은 2018년부터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지만, 여전히 미국은 묵묵부답이다.
지난해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4·3 심포지엄’에서 존 메릴 전 국무부 정보조사국 동북아국장은 “4·3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객관적 사실이다. 어떤 식으로든 미국 쪽의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977년 제주에 잠깐 체류했던 경험을 언급한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는 “제주도민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하고 존중하는 것 이외에도 더 큰 목표를 이루는 데 4·3과 제주도의 의미가 있다”며 “미국이나 한국 정부가 단 한번의 조처로 모든 고통과 상처, 잘못을 위로하고 보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계적으로 조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이성윤 미국 터프츠대 교수도 “미국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4·3에) 연민과 존중을 보인다면 한-미 동맹은 보다 강력하고 가까워질 수 있다”며 “4·3평화공원을 방문하는 등 낮은 단계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금 시점에서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가 희생자들과 연대해 발언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며 단계적 접근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에는 4·3을 연구하는 학자는 물론, 4·3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갖춘 정치인들도 매우 드물다. 이 때문에 4·3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선 미국 의회 등 정치권을 상대로 한 설득과 함께 정부·민간 차원의 홍보 활동, 언론을 통한 공론화 작업 등이 동시적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4·3 유족들은 “4·3과 관련해 미국의 개입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가 나왔다. 이제는 미국이 입장을 표명할 때”라며 “이를 위해 먼저 미국 사회에서 4·3이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제주대의 현직 교수는 “미국의 학계가 모르고, 정치인들은 4·3을 더욱 모르는데 사과할 수는 없지 않으냐. 우선은 미국 사회에 4·3과 미국의 관계를 알리는 게 우선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4·3연구소도 “미국 사회에 4·3을 알리는 노력의 하나로 미국 대학 내에서 4·3에 대한 교육과 홍보가 이뤄져야 한다”며 “한국과 미국 연구자들의 공동연구를 통해 4·3의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75주년을 맞아 우선 주한미국대사관 관계자들이라도 추념식에 참석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