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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몰러 갔다가 폭탄 맞은 12살 소녀…“지금도 죽음이 두렵다”

등록 2018-12-20 04:59수정 2018-12-28 13:22

제주4·3 동백에 묻다 2부(10)
4·3후유장애인 김순혜씨의 1948년 ‘그날’
12살 때 맞은 폭탄 파편 48년간 몸 안에 담고 살아
밭일 다녀오던 큰오빠는 군인들에 끌려가 총살
함께 끌려가던 작은오빠는 할머니 애원 덕에 귀가
제주4·3후유장애인인 김순혜씨가 12살 때 폭탄이 떨어진 큰 바위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주4·3후유장애인인 김순혜씨가 12살 때 폭탄이 떨어진 큰 바위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순혜(82·제주시 연동)씨는 48년 동안 폭탄 파편 2개를 몸속에 지니고 산 4·3후유장애인이다. 김씨의 오른쪽 허벅지와 등에는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가 있다. 70년 세월이 지나 상처는 아물었지만 뚜렷하게 남아있는 흉터는 ‘그 날’의 고통을 짐작게 했다.

17일 오후 김씨와 함께 그가 살았던 당시 제주읍 오라2구 섯구린질을 찾았다. 도시개발 등으로 그 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기억은 또렷했다. 경사진 도롯가에 선 김씨가 지팡이를 들고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기억을 풀어냈다.

소 몰러 갔다가 폭탄 파편 맞은 12살 소녀

1947년 11월 초순께, 날이 저물자 남동생(김산석·80)과 함께 밭에 풀어뒀던 소를 몰아오기 위해 집 서쪽 밭으로 갔다. 김씨 가족은 소 5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김씨는 “남동생한테 아래로 가서 길을 막고, 나는 위쪽으로 가서 소를 몰아오겠다고 한 뒤 소가 있는 밭으로 향하던 참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길 아래쪽에서 청년 두 명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김씨가 속으로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있나 보다’라고 생각할 즈음 무언가 ‘쉭쉭’하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가 ‘팍팍’하며 몸에 부딪혔고 기억이 끊겼다. 이날은 토벌대가 연동리(지금의 신제주)에 불을 지른 날이었다. 9연대 군인들이 도령모루(지금의 신제주입구 교차로)에서 직선거리로 1㎞ 남짓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들을 발견하고 쏜 폭탄이 길옆 엉석(큰 바위)에 떨어졌고, 그 파편이 김씨 몸으로 튀어 박힌 것이다. 김씨 나이 12살 때였다. 두살 아래 남동생(김문석)이 집에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힌 오빠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웃 주민이 밭에 갔다 오다 “이 집 딸이 길가에서 죽어있더라”고 집에 전했다.

제주4·3후유장애인인 김순혜씨가 12살 때인 1948년 11월 폭탄 파편을 맞은 뒤 기어가 기대앉았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제주4·3후유장애인인 김순혜씨가 12살 때인 1948년 11월 폭탄 파편을 맞은 뒤 기어가 기대앉았던 곳을 가리키고 있다.
정신을 잃었다가 한참 뒤 깨어난 김씨는 길 서쪽 밭 물고랑으로 기어가서 기대앉았다. 고무줄을 넣은 몸빼(일바지)를 만져보니 오른쪽 바짓가랑이에 피가 고여 있었다. 등이 선득선득해 손으로 만지는데 손가락이 움푹 들어갔다. 그제야 무언가에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폭탄 파편이 12살 소녀의 오른쪽 허벅지와 등을 파고든 것이다.

날이 어둡자 큰오빠(김두석·당시 24)가 동생을 찾아 나섰다. 큰오빠는 달려와 ‘어디가 아프냐’고 묻자 김씨가 말했다. “어디사 아픈지 모르쿠다. 다리도 피가 고득고, 등땡이에도 막 피남수다.”(어디가 아픈지 모르겠어요. 다리에도 피가 가득 차고, 등에서도 피가 쏟아지고 있어요) 큰오빠는 울면서 여동생을 업고 집으로 뛰었다. 오후 7~8시께였다.

딸을 본 어머니는 “잘 보지도 못해 딸 하나에 의지해 사는데 죽으면 어떻게 사느냐”며 몸부림쳤다. 당시 어머니 눈은 실명에 가까운 상태였다. 아버지 친구 두 명이 나뭇가지와 가마니로 돌채(들것)를 만들어 김씨를 1시간 남짓 걸리는 제주도립의원으로 옮겼다. 어머니도 돌채를 잡고 밤길을 걸었다. 오라리를 지나 성담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에게 빌다시피 사정해 통과했다. 아버지와 오빠들은 군인들한테 붙들릴까 두려워 길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주도립의원이 문을 닫아 인근 십자의원을 찾아 다음날 수술을 받았다. 완치가 되지 않았지만, 21일을 살고 아버지와 오빠들 때문에 집으로 돌아왔다.

김순혜씨가 4·3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순혜씨가 4·3 때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할아버지 생일에 끌려간 큰오빠 희생

지난 16일은 큰오빠의 일흔 번째 제삿날이었다. 큰오빠는 연동에 집을 마련하고 결혼날짜를 잡은 상태였지만, ‘그 날’ 보리 파종을 나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948년 12월11일은 할아버지 생일이었다. 이날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아침 ‘생일 밥’을 먹은 뒤 큰오빠와 작은 오빠(김일석·당시 17)에게 보리 파종을 시켰다. 집 아래에 ‘죽을왓’이라는 밭이 있었다. 마침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연동에서 오라 쪽으로 달리는 ‘폭도’ 두 명을 봤다고 했다. 군인들은 보리 파종을 하러 갔다 귀가하는 오빠들을 발견하고는 집 옆 밭으로 끌고 갔다. 그러고선 “폭도를 잡아왔으니 나와서 모두 보라”며 주민들을 불러모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현장에 있었지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김씨는 “아들이라고 하면 온 가족을 죽일 것 같아 아버지는 차마 말을 못했다”고 했다. 군인들은 공포를 쏘면서 ‘폭도인지 아닌지 바른말을 하라’고 닦달했다.

“큰 오라바님은 나이 이시난 속솜허고, 샛 오라바님은 어리난 막 떨멍 ‘할머니, 날 살려줍서’허멍 들럭키멍 우는 거라. 경해도 팡팡 총 노멍 폭도엔 죽여불켄 허멍 성제를 몰아아졍 갑디다게. 아버지는 새파랑행 봄은 허여도 이녁 아덜이엔 못해수다.”(큰오빠는 나이를 좀 먹었으니 잠자코 있었지만, 작은 오빠는 어리니까 마구 떨면서 ‘할머니, 나를 살려주세요’하면서 몸부림치면서 우는 거야. 그래도 팡팡 총을 쏘며 폭도를 죽이겠다면서 형제를 끌고 갑디다. 아버지는 새파랗게 질린 채 보기만 하고 자기 아들이라고 하지 못했어요.)

김순혜씨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12살 때 폭판 파편을 맞은 깊은 상처가 아직도 있다.
김순혜씨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12살 때 폭판 파편을 맞은 깊은 상처가 아직도 있다.
할머니의 절규 ‘폭도가 아닙니다’

할머니가 손자들 손을 뒤로 묶어 끌고 가는 군인들을 쫓아가며 “폭도가 아닙니다. 내가 데리고 사는 손자들입니다. 보리 파종 갔다 오는 길인데 (당신들이) 잡아가는 겁니다”라고 매달렸다. 연동으로 가던 군인들은 연미마을에 들어서자 할머니한테 작은 오빠를 돌려보낼 테니 쫓아오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는 작은 오빠만 데리고 집으로 왔다. “큰 손진 돌앙가고 이거 호나만 살려준덴 허멍 보냉 돌앙왔져. 돌앙 안가민 둘다 죽여불켄 허난 홀수어시 돌앙왔져.”(큰 손자는 데려가고, 이거 하나만 살려준다며 보내 데려왔다. 데려가지 않으면 둘 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니 할 수 없이 데리고 왔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던 할머니는 조금 뒤 “큰 손자를 데리고 간 곳을 가봐야겠다”며 다시 집을 나섰다.

큰 오빠가 끌려간 곳은 연동 공회당 옆 사장밧이었다. 할머니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진 뒤였다. 할머니는 치마를 벗어 손자의 얼굴에 덮은 뒤 바닥을 뒹굴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할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집에서도 한참을 뒹굴며 울부짖었다. “죽여서라. 총으로 죽여서라. 어떵허민 좋으리.”(죽였어. 총으로 쏴 죽였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김씨는 “할머니가 곧 죽을 정도로 애통해했다”고 말했다.

눈발이 ‘파딱파딱’ 흩날리고 추운 날이었다. 큰 오빠를 끌고 간 군인들은 공회당으로 주민들을 불러모았다고 한다. 큰 오빠는 당시 턱에 허물이 나 녹대(굴레의 제주 방언) 쓰듯 하얀 헝겊으로 얼굴을 싸맨 상태였다. 군인들이 일본군이 쓰던 가죽 허리띠로 큰오빠의 팔을 뒤로 꺾어 목과 함께 묶자,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군인들이 발로 차면 쓰러지기를 여러 차례 하다가 큰 오빠의 움직임이 없자 총을 쐈다고 했다. 할머니는 연동마을 주민들한테 이 얘기를 들었다. 훗날 김씨의 남편이 된 양치부(작고)도 이날의 목격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김씨의 시아버지도 4·3 때 목포형무소에서 희생됐다.

군인들이 철수하자 동네 주민들이 큰오빠의 주검을 집 옆 빈 밭으로 옮겨온 뒤 죽을왓에 안장했다. 중산간으로 작은 오빠 등에 업혀 피난 가던 막내 남동생(김문석·당시 7)도 소에게 밟혀 이듬해 숨졌다.

김순혜씨.
김순혜씨.
48년 만에 폐에서 폭탄 파편 제거 “사난 살았주”

김씨는 23살에 남편을 만나 연동으로 시집오기 전까지는 아픈 줄을 몰랐다. 4·3이 끝나 농사가 안되자 땔감을 베다 팔러 시내를 다녔다. 한 지게 가득 땔감을 팔면 겉보리 한되를 줬다. 그것을 맷돌에서 갈아 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남편과는 일만 하며 살았다. 그러나 6남매를 낳은 뒤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 통증이 시작됐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날이 많아졌다.

병원에 가도 감기 증세라며 감기약 처방만 해 그런 줄 알았다. 약을 먹으면 진통이 멈췄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아프기를 되풀이했다. 치병 굿도 여러 차례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1994년 제주 시내 병원에서 엑스선 촬영을 해보니 폐에서 이물질이 발견됐다. 병원에서는 암이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다른 병원을 찾았다. ‘암은 아니다’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서울의 한 대학병원으로 갔다. 몸을 살피던 의사가 등에 난 상처에 대해 물었다. 김씨는 “12살 때 폭탄을 맞은 적이 있다”고 했다. 폭탄 파편이라 결론 내린 의사가 수술에 들어갔다. 1995년 10월이었다. 폐에 박혀있던 엄지손가락만 한 파편 2개를 꺼냈다. 의사는 “어떻게 48년 동안이나 파편을 몸속에 담고 있었느냐”고 했다.

어린 시절의 공포는 평생 김씨를 따라다녔다. 김씨는 “남편이 외출 갔다 돌아올 때면 깜짝 놀라곤 했다. 인기척이라도 내고 다니라고 할 정도였다. 두려움을 계속 가지고 살았다”고 했다.

“그 사태에 난 죽어져신가만 생각해수게. 이추룩 살아지카부덴 생각을 안해수다. 사람이 살젠 허민 목숨이 질기는 겁디다. 사난 살았주기양.”(그 사태에 난 죽었는가만 생각했어요. 이렇게 살아지리라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사람이 살려고 하면 목숨이 질깁디다. 사니까 살았지요.)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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