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때 아버지와 큰 누나를 잃은 이재후씨가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버지(이항숙)는 같은 마을 사돈어른과 함께 제주읍 북촌리 해동마을의 돌 틈에 몸을 숨기고 서쪽 몬주기알 낭떠러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북촌리 마을주민들도 여럿 있었다. 1948년 12월 11일 오후 5시께가 되자 ‘탕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군인들은 북촌에서 끌고 온 여인들을 바닷가 낭떠러지에 세워놓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 맞은 여인들이 낙엽 지듯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해동마을은 함덕해수욕장 옆 서우봉을 감아 도는 제주올레 18코스가 지나는 곳이다. 북촌초등학교에서 1㎞ 남짓 떨어진 마을은 바닷가에 있어 서쪽 몬주기알 낭떠러지가 잘 보였다. 한참 뒤 2연대 군인들이 철수하자 아버지는 사돈어른, 마을주민들과 함께 큰누나(이선환·당시 21)의 주검을 들것으로 옮겨 와 북촌초등학교 서쪽에 가매장했다. 큰 누나는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새색시였다. 먼저 잡혀간 매형은 행방불명 상태였다.
군인들이 마을에서 악행을 일삼자, 큰누나와 젊은 여자들은 이들을 피해 마을 인근 동굴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군인들에게 발각돼 갖은 고초를 겪다 낭떠러지 처형장에서 꽃다운 젊음을 마감했다.
서우봉을 끼고 도는 제주올레 18코스의 바다로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몬주기알 낭떠러지다.
새색시 큰 누나 낭떠러지에서 총살
큰 누나를 묻고 온 날 저녁, 어머니(원희화)는 아버지와 사돈어른을 모시고 식사를 준비했다. 9살이던 이재후(79·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씨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딸은 우리 손으로 묻어줬지만, 우리가 죽으면 누가 묻어줄 건가.” 앉아 있던 사람들은 울었다. 이씨는 “시국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아버지도 당신께 닥칠 운명을 예감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큰 누나와 젊은 여자들을 학살한 이들은 2연대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동굴에서 찾아낸 여자들을 함덕 대대본부로 끌고 갔다. 이씨는 “잡혀간 날짜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곳에 10여일 정도 갇혀있다가 희생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4·3 때 아버지와 누나 잃은 제주 북촌리 이재후씨
군인 악행 피해 동굴 피신한 큰누나 낭떠러지서 총살
아버지는 한달여 뒤 북촌리 대학살 때 희생
살아남은 작은누나·여동생은 홍역으로 숨져
“마지막 소원은 국가 배상 받아 비석 세우는 것”
큰 누나가 죽고 닷새가 지난 1948년 12월 16일, 이번에는 마을을 지키며 군·경에 협조하던 주민(민보단원) 24명이 낸시빌레의 밭(북촌리와 동복리 경계)에서 집단학살됐다.
더 큰 죽음의 공포가 마을을 덮쳤다. 이듬해인 1949년 1월17일 북촌리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북촌초등학교 인근 너븐숭이에서 무장대 습격을 받아 부대원 2명을 잃은 군인들이 보복 삼아 집집이 불을 지른 것이다. 이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을주민 모두를 학교 운동장으로 내몰았다. 이승재(85)씨는 “집에서 나와 운동장으로 가면서 돌아보니 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재후씨가 4·3의 경험을 이야기하다 북받친 듯 울먹이고 있다.
총에 대검을 꽂은 군인들은 북촌리 안골목의 이씨 집에도 들이닥쳤다. 착검한 총으로 문을 찍어 열어젖힌 뒤 운동장으로 나오라고 윽박질렀다. 아버지가 먼저 나갔고, 어머니는 형(당시 13)과 둘째 누나(당시 11), 여동생(당시 4)이 뒤따랐다. 이씨는 할머니(당시 50대 중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이씨는 “할머니 치마 속에 숨어 병아리처럼 고개를 내밀고 지켜봤다. 학교 남쪽 정문과 동·서쪽 울타리 주변에 총 든 군인들이 보였다. 총소리가 났고, 사람들이 학교 밖으로 끌려나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근처의 밭으로 끌고 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운동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제주4·3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자료집>에는 이날 희생된 주민만 282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와 있다. 희생자 중에는 이씨 아버지도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곳은 너븐숭이 인근 개수왓이었다. 이날 오후 5시께 지휘관이 탄 지프가 함덕에서 오면서 학살극은 멈췄다. 이날 학살을 주도한 2연대 3대대는 월남한 서북청년 위주로 편성돼 ‘서북대대’라 불렸다.
“덜 서러워야 눈물 나지…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세찬 바람과 섞여 눈발이 흩날렸고, 매캐한 냄새와 연기가 마을을 뒤덮었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곡식과 가축이 타는 냄새로 목이 멨다. 마을의 초가들은 대부분 불에 탔다. 군인들은 이씨 집에도 불을 놓았지만 다행히 불길이 번지지 않았다. 집을 잃은 주민 20여명이 이씨 집에 모여들었다. 주민들은 타죽은 돼지를 옮겨와 솥에 넣어 삶았다. 또 다른 솥에는 조를 넣어 조팝(조밥)을 지었다.
제주 북촌초등학교에 한쪽에는 ‘제주4·3 북촌주민 참사의 현장’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날은 음력으로 섣달 열여드렛날. 늦게 뜬 겨울 달이 불에 탄 북촌마을을 비췄다. 할머니가 집 마당에 서서 이씨의 손을 잡고 달을 향해 혼잣말로 읊조렸다.
“명경 같은 하늘님아. 우리가 무슨 죄를 지어수과. 말이나 허여줍서. 검은 것이 가메귀요, 흰 것이 백로로 알고, 식게 나민 떡반 태와주고, 이웃집 우는 애기 시민 젖 맥여주고, 비와 가민 장항 더꺼주고, 이렇게 평화롭게 살던 우리안티 이게 무슨 일이우꽈.”(거울 같은 하느님아,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말 좀 해 주세요. 검은 것이 까마귀요, 흰 것이 백로로 알고, 제사가 있으면 음식을 나눠주고, 이웃집 우는 아기 있으면 젖을 물려주고, 비가 오면 장독 뚜껑 덮어주고, 이렇게 평화롭게 살던 우리에게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얼마 뒤 어머니가 돌아왔다. 어머니가 입은 갈옷(제주의 전통 노동복)과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손을 씻은 어머니가 동네 어른 10여명이 모여앉은 부엌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덜 설러와사 눈물나주(덜 서러워야 눈물 나지). 먹게(먹자). 먹게. 오늘 밤 일도 모른다. 내일 일도 모른다. 한번 배불리 먹엉(먹고) 죽게(죽자).” 누군가 “아버지는 어떻게 했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찾아서 가마니만 덮고 왔다”고 했다. 그러자 어른들은 “누구 어머니는 어떻게 죽었더라”, “누구네 아버지는 어디서 죽었더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조밥을 도고리(함지박)에, 삶은 돼지고기를 조짚 위에 내놨다. 주위에 있던 어른들은 고기를 손으로 뜯어먹고, 밥도 손으로 먹었다. “그날 종일 그 일을 당하고, 다음 날은 죽을 거로 알아서 사람들이 정신이 나간 상태였어. 남편과 아내, 부모·형제가 죽어서 울어도 시원치 않은데 우는 사람이 없었어. 그저 넋이 나간 상태였지. 그날 할머니, 어머니가 했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
이튿날 북촌리 주민들은 인근 함덕리로 소개됐다. 그곳에서 수십 명이 추가로 총살됐다. 이씨 가족은 함덕리 큰고모집의 쇠막(외양간)을 빌려 살다가 1949년 4월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남촌’이 된 북촌리의 여성들은 초가지붕의 띠를 잇고, 남편과 부모·형제의 주검을 수습하고 마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제주에 홍역이 번졌다. 학살을 피한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이씨의 둘째 누나와 여동생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훔친 고구마 한 개, 사랑의 쌀 한 줌 모으기 운동으로
4·3이 일어났을 때 이씨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하지만 학교는 곧 폐교됐다. 인근 함덕중학교 1학년에 다닐 때는 같은 마을 친구가 고구마를 훔쳐먹은 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북촌리 학생들은 ‘폭도 새끼’라 멸시받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기껏해야 밀가루에 쑥이나 톳을 버무려 하루 한 끼를 해결했다.
“한 친구가 밭에서 고구마 한 개를 캐다가 주인이 오니 도망쳤어. 다음날 주인이 학교에 찾아와 교장 선생님께 항의했지. 체육 선생님이 수업이 끝난 뒤 북촌리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단단히 기합을 줬어. 기진맥진한 아이들 셋이 선생님 앞으로 나왔는데, 한 친구가 울면서 실토했어. ‘아버지는 4·3 때 행방불명되고, 어머니와 동생 둘하고 살고 있는데 집에 먹을 것이 없어 어제 학교에 와서 물만 먹었습니다. 선생님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한 거지. 체육 선생님이 감동을 하였는지 ‘좋다’면서 다들 돌아가라고 했어. 그 장면을 학생들이 모두 봤지. 다음날 그 선생님이 친구 책상에 도시락을 갖다놓은 거야. 친구가 일어서서 선생님이 없는 교탁을 향해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고 외치니까 친구들이 박수를 쳤어. 반장이 나와서 ‘배고픈 학생들을 위해 사랑의 쌀 한 줌 모으기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고, 학생들이 박수로 화답했어. 그랬더니 2, 3학년생들에게도 알려져 학생회 차원에서 사랑의 쌀 한 줌 모으기 운동이 벌어진 거야. 그때 고구마를 훔친 친구는 평생 남에게 즐겁게 베풀다가 저세상으로 갔어.”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했다. 이씨는 “홀몸인 어머니가 마차에 남의 짐을 실어 제주시내에 팔러 다니며 우리를 먹여 살렸다. 물때가 되면 물질하러 가고, 밭도 갈고, 땔감을 해와서 마차에 싣고 팔러 다녔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10여년 전부터 국가 배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4·3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해왔다. “사실을 밝히고 용서하고 화합의 길로 나가야지. 잘못했으면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억울한 죽음에 국가 배상이 이뤄지면 그 돈으로 비석을 세우고 싶어. ‘4·3으로 인해 돌아가셔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이 비석을 세웁니다’라는 글귀를 비석에 새기고 싶어.” 여든을 바라보는 이씨의 간절한 소망이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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