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3차전에서 한국은 독일과 맞닥뜨렸다. 경기 도중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의 독일 미드필더 슈테판 에펜베르크(46·은퇴)가 자국 응원단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욕설’을 쏟아냈다. 절대 열세로 예상됐던 한국이 시간이 흐를수록 믿기 어려운 저력으로 경기를 압도해 나갔고, 한국의 투혼에 놀란 독일 응원단마저 “도이칠란트를 때려 부숴라”며 응원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반에 세 골을 내줬던 한국은 후반에 독일 진영을 종횡무진 헤집었다. 무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던 경기장에서 독일 수비진의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지만 한국은 경기 막판까지 지칠 줄 몰랐다. 결국 독일에 2-3으로 패했지만, 홍명보 현 국가대표팀 감독이 “5분만 더 있었으면 역전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기억할 만큼 후반 저력은 대단했다.
당시 한국팀 공격진 선봉에는 등번호 10번을 달았던 ‘적토마’ 고정운(48·<스포티비> 해설위원)이 있었다. 그는 축구에서 경기력의 한 축이 체력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역대 한국 축구에서 가장 강력한 날개 공격수로 꼽히는 고 위원은 90분 내내 독일 좌우 측면을 유린했다.
고 위원은 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1994년 월드컵 때 너무 더웠다는 기억부터 난다.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면서 내가 22명 중에서 가장 많이 뛰었는데 피곤한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많이 움직이는 팀이 이길 수밖에 없다. 개인 기량을 발휘하는 것뿐만 아니라 팀 전체가 경기 내내 상대를 압박하고, 공수 균형을 유지하려면 체력이 기본”이라며 “경기력의 60~70%를 차지하는 게 체력”이라고 강조했다.
고 위원은 1994년만큼이나 뜨거운 날씨가 예상되는 브라질 현지 기후가 한국 대표팀에 ‘약’이 될 수도 있다고 봤다. 고 위원은 “미국 월드컵 때를 보면, 국내에서 여름을 견디는 한국 선수들과 달리 유럽 선수들이 뜨거운 날씨에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며 “벨기에나 러시아 선수들이 현지 환경에 적응하는 문제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고 위원은 “90분 내내 움직여야 하는 현대 축구에서 체력만으로 버티는 게 쉽지 않다. 왼쪽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선수들이 모든 국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월드컵에서 마음가짐을 더 강하게 다잡으면 평소 체력을 뛰어넘는 기량을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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