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17일 이탈리아 우디네 프리울리 스타디움, 전광판의 시계는 전반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반 20분까지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스페인의 간판 골잡이 미첼에게 전반 23분 실점한 뒤 완전히 주도권을 내줬다. 게다가 스페인은 우승후보였다. 0-2로 허무하게 패한 벨기에와의 1차전이 떠올랐다. 전반 막판 스페인 골문에서 25m가량 떨어진 곳에서 최순호가 얻어낸 프리킥은 귀중한 기회였다.
프리킥 상황에서 플레이는 약속돼 있었다. 최순호가 차기 좋게 수비벽 옆으로 살짝 밀어주면 킥이 정확한 조민국이 강한 슈팅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문 키커 조민국은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이는 등번호 9번을 단 당시 25살의 황보관이었다. 황보관(사진)은 벨기에와의 1차전에서는 벤치만 지켰다. 황보관은 최순호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른발로 강하게 찰 테니까 조금 앞으로 길게 밀어줘요.”
황보관과 눈빛을 주고받은 최순호는 공을 툭 밀었다. 그 순간 황보관은 용수철처럼 도움닫기를 한 뒤 공을 때렸다. 빨랫줄처럼 뻗은 공은 스페인 수비벽을 허물고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빨려들어갔다. 참패가 예상되던 상황에서 터진 만화 같은 총알슛이었다. 비록 후반에 미첼에게 두 골을 더 헌납하고 1-3으로 패했지만, 그 슛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한국 축구의 자존심이 됐다. 무려 시속 114㎞로 날아간 황보관의 ‘캐넌슛’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베스트 5 골 장면’에 선정됐다.
황보관(49)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그 골 장면에 대해 “세계 최고의 수문장이라는 수비사레타가 지키고 있었고 거리도 멀어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골을 넣겠다는 생각보다는 골문 안으로만 차면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그런데 킥을 하는 순간 느낌이 너무 좋았고 발등에 볼을 잘 맞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페인 골문 그물이 철렁거렸다. 그 순간 정말 짜릿했다”고 회상했다.
대한민국 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장면이 나왔지만 이탈리아 월드컵은 동시에 아픈 기억이기도 하다. 32년 만에 본선에 진출한 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 출전한 7번의 월드컵 중 3전 전패를 당한 유일한 월드컵이었다. 경험 부족이 문제였다. 황보 위원장은 “유럽 두 팀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너무 우리 중심의 준비를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상대도 모르고 우리 자신도 몰랐던 것이 아닌가 반성했다”고 말했다. 뼈아팠지만 이때를 계기로 세계 축구의 흐름을 빠르게 익혀야 한다는 반성이 제기됐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은 완전히 달라졌다. 23명 중 17명이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다. 미국 마이애미에서 대표팀 후배들과 함께하고 있는 황보 위원장은 “요즘 선수들은 영리해서 자기 역할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안다. 그 장점을 살리면 본선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허승 기자, 마이애미/박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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