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로 떠난 4월18일, 공항에서 집어든 칠레 신문의 1면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백년의 고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의 죽음은 호텔에 비치된 브라질 신문의 1면도 차지했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그의 작품은 라틴아메리카의 믿기지 않을 만큼 뒤틀린, 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담고 있다. 월드컵을 앞둔 브라질도 그렇게 모순적이다.
얼굴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위아래로 두세 번 뒤집었다. “그저 그렇다”는 뜻이다. “브라질에서 월드컵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에게는 더 우선하는 것들이 있다. 병원과 학교, 대중교통, 치안….” 브라질 3박 4일의 취재기간 동안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수없이 들은 대답이다.
그들은 분명 축구를 무척 사랑했다. “어릴 적부터 축구는 내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여자친구한테 쓰는 돈보다 축구에 쓰는 돈이 더 많다”고 말했다. “집 팔아 월드컵 경기를 보러 간 친구도 있다”고 전했다. “브라질은 축구의 나라다. 여기서 월드컵 하니 당연히 좋다. 우승하면 금상첨화다”라며 기뻐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축구의 대축제가 내 땅에서 열려도 현실은 ‘따봉!’(좋다!)을 외치게 두지 않는다. “병원에서 의사 면담 한 번 하는 데 1~2일 기다려야 한다”거나, “응급사고가 나도 의사도 약도 부족하니 기다려야 한다. 재수가 없으면 죽는다”고 말했다. “공립학교는 월급이 낮아서 좋은 교사들이 없다”고, “사립대학은 엄청나게 비싸고, 국립대학은 당신 같은 한국 사람처럼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들어가기 힘들다”고 전했다.
브라질은 지난 10년간 3000만~4000만명이 중산층에 새로 진입한 것으로 추산되고, 기대치도 그만큼 높아졌다. 그래서 그들은 “축구장만 필요한 게 아니라 학교와 병원도 더 필요하다”고, “공공서비스가 훨씬 더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류 축구장’보다 ‘삼류 공공서비스 개선’이 더 급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월드컵 경기장 건설비용만 애초 계획보다 70% 가까이 늘어난 80억헤알, 약 3조7000억원이 들었다. 월드컵 유치 총비용은 사상 최다인 110억달러로 분석되고 있다. 반면 기대효과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월드컵 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이유다. 축제라는 월드컵을 앞두고 가뜩이나 힘겨운 삶은 더 팍팍해졌다. 500㎖ 생수는 슈퍼마켓에서 사도 한 병에 2헤알이다. 약 930원이다. 택시 기본요금은 4.1헤알이다. 고기뷔페 전문점 슈라스카리아에서는 남자 1명에게 89헤알을 받는다. 음료수와 후식은 별도다. 축구공을 파는 제지뉴는 “우유도 고기도 두 배 가까이 올랐다. 지난해부터 올해 사이 전부 비싸졌다”고 불평했다. 반면 최저임금은 724헤알에 불과하다. 경제는 나빠지고 있다.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곳곳 산비탈에는 빈민촌 ‘파벨라’가 보인다. 리우에만 이런 파벨라가 700~1000곳으로 추정된다. 상파울루 시내를 벗어나 공항으로 가는 길에 파벨라가 있고 그 옆 교도소 앞에 줄이 늘어섰다. 택시기사 에소는 “이곳에서 범죄가 많이 일어나서 여기다 교도소를 지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거기서 태어나고 자라다 범죄에 빠지고, 아들과 남편은 감옥에 가고 아내와 엄마는 그들을 만나러 일요일 아침 줄을 설 것이다.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리우의 해변에는 헬리콥터를 타고 해변 경치를 즐기는 관광객 아래, 3헤알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행상과 2헤알에 사탕을 파는 초라한 꼬마가 모래사장을 바삐 돌아다닌다. 브라질 정부는 “풍요롭고 가난이 없는 나라, 브라질”을 구호로 내걸고 있다. ‘떠오르는 대국’ 브라질의 또다른 모습이다.
살인과 성매매, 마약, 범죄의 소굴이라며 이방인은 얼씬도 못하게 말리는 파벨라가 널린 현실에 월드컵이란 행사가 무슨 의미일까? 그들은 “입장권을 살 돈이 없다”고 말했다. 한 택시기사는 “나는 뚱뚱하고 나이든 돈 없는 (축구선수) 호나우두”라고 자조했다. 관광안내원 클라우자는 “관광객이 많이 오면 나한테 무슨 소용인가? 정부한테나 중요한 일이지. 나한테는 똑같다”고 말했다. 개막전을 위해 신축되는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축구장을 둘러보며 기념사진을 찍던 헤네에게 ‘성공적 월드컵 개최’는 큰 관심이 아니었다. 헤네는 “월드컵이 끝나면 우리 동네에 내가 좋아하는 팀이 뛰는 ‘우리 축구장’을 갖게 되는 게 기쁘다”고 말했다.
4월 초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 55%가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얻는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월드컵 개최 찬성 의견은 48%로 떨어졌다. 12개의 월드컵 경기장 신·개축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데 대해, 샨드리는 “지금도 경기장이 많은데 월드컵 지나고 나서 뭐 하나? 유지하려면 또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비난을 쏟아냈다.
월드컵 유치를 둘러싼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정치불신은 뿌리가 깊다. “다 도둑들이다. 축구장 건설 비용을 늘리면서 엄청나게 빼돌린다”고, “날마다 새로운 부패 사건이 터져 나온다”고 비난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과 집권 노동자당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도적떼”라고 조롱하는 이도 있다. “노동자당은 이름뿐, 거짓말 정당”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리우 해변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축구선수, 가수, 의사와 함께 돈을 잘 버는 게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인기는 떨어져 4월 초 38%를 기록했다. 뒤틀린 현실과 터질 듯한 불만은 우승컵조차 기쁘지 않게 만든다. 택시기사 호나우두는 “브라질의 우승을 원하지 않는다”며 “호세프 현 대통령이 재선하는 데 유리해지는 게 싫다”고 말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의 제목은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다. 식민지배와 독재를 거쳐 빈곤과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에서 고독은 찾아온다. 브라질의 쓰러질 듯한 파벨라는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산비탈을 둘러싼 빈민촌 ‘바리오’와 다르지 않다. 공공 분야의 낙후는 칠레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익히 보고 들은 얘기다. 그래서 ‘축구의 나라 브라질의 대축제’ 월드컵은 유럽인들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찾던 유토피아, 황금의 땅 ‘엘도라도’나 <백년의 고독> 속 돼지 꼬리가 달린 아이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축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고달픈 하루하루의 삶을 모두 채우지는 못한다.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만난 루시우는 말했다. “마음으로는 기쁘지만, 머리로는 괴롭다.” 지난해 브라질의 대규모 시위는 단지 버스비를 3헤알에서 3.2헤알로 올려서가 아니라, 삶을 외면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터져 나왔다. “우리는 월드컵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축구장에만 지나친 돈을 쏟아붓는 데 반대하는 것이다.” 축구가 좋아서 리우의 텅 빈 마라카낭 경기장에 20헤알을 내고 방문한 타치아나가 한 말이다.
리우를 떠나 공항으로 가는 길, 삼바축제가 펼쳐지는 삼바드롬을 지난다. 그 화려한 삼바축제도 1년에 한 번뿐이다. 조금 더 가면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마라카낭 경기장이다. 콜롬비아는 2011~2013년 브라질월드컵 예선전에서 <백년의 고독>에 나오는 마을처럼 ‘마콘도’로 이름 붙인 축구공으로 경기를 벌였다. 모순적 현실 앞에 라틴아메리카는, 브라질이라는 마콘도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말한 대로 고독하다. 그들은 “축구는 삶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축구 말고도 중요한 게 더 있다”고 말했다. 창가로 비탈진 언덕에 파벨라들이 보인다. 삶은 축구장에도, 저 허물어지는 산비탈에도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은 백년보다 더 길다. 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
글·사진 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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