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스케이프의 연속성과 역동성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인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최이규 제공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에 의하면, 수직선과 수평선은 외로운 선들이다. 0도부터 360도 사이에는 수많은 사선이 무한대로 존재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서 본질에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수직과 수평은 오직 단 하나, 홀로 존재한다. 여기에 인간적인 감정을 이입하여 외롭다고 표현한 것이다.
무색무취인 선에 사람처럼 성격과 개성을 부여한 것은 물론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고, 자못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가 덧붙이길, 수평선은 차갑고, 수직선은 따뜻하다고 한다. 언뜻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지만, 우리가 평소에 늘 반복해서 경험하는 자연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0도의 선, 말 그대로 수평한 선은 물의 선밖에 없다. 연못이나 바다에 고여있는 물에서 우리는 대개 검고 차갑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직선 또한 자연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오의 햇빛이나 곧게 자라는 나무에서 따뜻함을 유추할 수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떨까? 칸딘스키에 의하면, 사람은 따뜻하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선이다. 즉, 수직이기도 하고 수평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사람, 서 있거나 걷는 사람, 생명이 있는 사람은 수직적이고, 잠들어 있거나 죽은 사람은 수평이다. 0도와 90도 사이를 반복한다. ‘수직=따스함’ ‘수평=차가움’이라는 칸딘스키의 주장이 전혀 맥락이 없지는 않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압축적이면서 성공적인 심볼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 또한 칸딘스키의 이론을 빌려 해석하자면,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선이 하나의 점에서 교차한다는 의미가 된다. 유일한 수직선과 수평선을 이미 독점해버린 이만큼 간결하고 멋진 디자인은 다시 없을 것이다.
건축은 수직과 수평이라는 두 가지 외로운 선을 이용한 행위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만물은 닳고 달아 수평으로 근접하게 마련이지만 건축은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여기에 대항한다. 수직을 통해서 수평을 세우려는 의지이고, 중력이라는 우주의 법칙에 반항하는 레지스탕스적 활동이다. 언제 기울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수직선 위에 바다의 평평함에 맞먹는 수평선을 올리려는 황당한 시도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도 외로움에 익숙해지면 점점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하듯, 외로운 선들은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건축이 쌓는 수평선, 각각의 층은 동떨어진 공간이다.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위층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수직으로 배열된 수평적 공간 간의 교류는 거의 힘들다. 우리는 매일 각자의 고원에 진입한다. 물이 그러하듯이 수평의 공간은 본질적으로 머물고 정지하는 공간이다. 방이란 완벽한 수평 공간이고, 그래서 방에만 들어가면 괜히 드러눕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마야 린의 워싱턴 베트남전 추모공원은 경사로 건축의 백미를 보여준다. 최이규 제공
그런데 사실 자연에는 어딜 봐도 인간의 건축 마냥 수평한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대지란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정도씩 기울어져 있다. 절대적 수직 수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칸딘스키식으로 표현하자면, 항상 운동 중이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완벽한 수평이라는 사실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럽지 못한 사실이다. 물론, 책상도 놓을 수 있고, 냉장고도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울퉁불퉁하거나, 삐딱하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수평을 추구한다. 모든 물건이 내가 배치한 그대로 중력을 받으면서 내일 아침에도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수평적 공간은 그 자체로 변화를 거부하는 속성이 있고, 보수적이고, 좀 더 확대 해석하자면 폐쇄적인 본성이 있다. 벽의 도움을 통해, 수평의 공간은 온전히 혼자라는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에 반해, 기울어진 공간, 즉 경사진 공간이란 여행의 공간이고 개방의 공간이다. 고여있는 물과 달리 자연의 땅, 즉 대지는 언제나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러한 대지의 특징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경사로 건축의 원조 격이다. 위아래로 뻥 뚫린 단 하나의 공간에는 각각의 방, 즉 ‘전시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아이들은 즉각적으로 호감을 나타낸다. 특별한 사전 지식이 없이도 공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원한 느낌을 준다. 건물 자체는 밖으로든 안으로든 미색의 평범한 콘크리트지만, 형형색색 옷을 입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바로 풍경이 된다.
미술관 관람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꼭대기로 올라가서 경사로를 따라 마치 공이 굴러가듯 천천히 내려오면서 보는 방식이다. 중력에 의해 움직이는 공간이고, 대지의 연속성, 즉 랜드스케이프(주변 경관)를 건물 내부로 끌어들인 공간이다. 정지가 아니라 움직임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각각의 장면보다는 시퀀스(장면의 흐름)가 강조된다. 작품이 하나의 방, 혹은 하나의 벽을 차지하고 있는 기존의 미술관에서 미술은 목적지이자 내가 미술관에 온 이유가 되지만, 구겐하임에서 예술은 어쩐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방관자적 태도라고 할 수도 있다. 경사진 길에서 휙휙 스치는 이미지들이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경사로 건축은 자하 하디드 설계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인데, 실내에서 구불구불 돌아가는 경사로는 구겐하임과 달리 무척 폐쇄적이기 때문에 방향 감각을 잃게 한다. 더욱 나쁜 것은 구겐하임과 달리 걸으며 볼 수 있는 풍경이 없기 때문에 경사로가 그저 통로로만 쓰이게 되고, 갑갑하고 지루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개방성이라는 랜드스케이프의 특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폭으로서 애초에 전시의 목적으로 계획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개 이동 루트로만 쓰이고 주요 전시는 각각의 수평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자체는 크지만, 각 공간이 상당히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테이트모던의 경사로는 통로가 아닌 그 자체의 공간이다. 최이규 제공
경사로 자체가 공간으로 쓰인 가장 멋진 사례는 아마도 워싱턴의 베트남전 추모공원일 것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마야 린이 설계한 이 공간은 기존의 모든 기념비에 대한 선입견을 깨트려버린 역작이다. ㄱ자 모양의 내리막과 오르막, 단 두 개의 경사로와 검은 벽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간결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번잡하지 않은 동선과 공간은 자칫 지나치게 단순하지 않은가, 이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마야 린의 설계는 바로 그 점이 핵심이다. 공간은 개방되어 있고, 쉽고, 친절하다. 휠체어를 탄 상이용사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품위 있게 전우의 이름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조각이 아닌, 공원을 둘러싼 나무들이 바로 전쟁의 무상함과 슬픔을 말없이 전해준다. 인간이 만든 것은 그저 대지에 새긴 하나의 길일 뿐이다.
요즘 산행을 다녀보면, 기존의 계단식 등산로를 목재 데크 경사로로 바꾸어놓은 곳이 많다. 특히 청송 주왕산 계곡 경사로의 접근성은 꽤 인상적이었다. 만드는데 더 많은 에너지와 생각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유모차를 미는 부모가 계곡 상단부까지 올라갈 수 있게 설계했다는 점은 사뭇 감동적이었다. 몇 해 전,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시원하게 개방된 경사 진입로를 봤을 때,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한 평이라도 아까운 입장에서는 입구를 계단으로 처리하고 넓은 수평면을 확보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지 않을까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경사로를 역동의 공간, 변화의 공간, 통로가 아닌 여행으로서의 삶의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곳은 낭비가 아닌 하나의 멋진 공간이다. 인생은 경사에서 더욱 재밌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