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산토리니의 담은 공동체의 상징이다. 최이규 제공
담장이란 대개 방어나 차단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건축적 고안물이지만, 역사적으로 잘 작동했던 것 같지는 않다. 영화 〈킹덤〉에서 담이나 벽은 좀비를 막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살길을 막는 부패의 상징으로 부각된다. 뉴욕 월스트리트에 세워졌던 높은 목책 담은 애초에 원주민들의 침략을 막겠다는 의도였지만, 실제로는 아프리카에서 실려 온 노예의 탈출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담장 아래 길거리에서는 유아와 아동을 포함한 노예 경매가 이루어졌고, 그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지금은 뉴욕증권거래소가 자리 잡게 됐다.
역사의 퇴행인지, 요즘의 담은 부조리를 넘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멕시코 국경을 따라 1마일당 300억원 짜리 최첨단 담장을 구축했지만, 약간의 고소공포증만 극복하면 5달러짜리 각목 사다리만으로도 월경이 가능하다는 게 여기저기서 증명되고 있다. 담은 한 사회가 보여주는 집단적 광기의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중국의 왕조들이 수백만 백성의 피로 건설했던 만리장성이야말로 담장이 보여주는 희극의 끝판왕이다. 홍타이지가 굳이 힘들게 장성을 무너뜨리지 않고도 유유히 산해관을 통과해 중원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정부패한 명나라의 관료체제가 스스로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현명한 군주는 오히려 담을 없앴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막강한 군사력을 토대로 로마 시대 이후로 이어져 온 파리의 성벽을 허물어 버렸다. 담이 실제로 방어의 역할을 못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적을 봉쇄하는 것은 강력한 군대의 존재 자체다. 적이 파리의 담벼락에 도달했다면, 전쟁의 향배는 이미 정해진 것이라 보았다. 성벽을 허문 널찍한 공터를 따라 숲길을 조성했고, 블러바드(boulevard)라고 부르는 대로는 아직도 시내 주요 지점을 감싸고 연결하며 파리의 상징 경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담을 허문다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인 것이다.
담이란 게 결국 두려움을 강함으로 포장하기 위한 허세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깨달음은 90년대 이후 유행했던 담장 허물기 사업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대구 삼덕동의 김경민씨가 자발적으로 집 앞 담을 제거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치안 측면에서도 득이었다. 담 때문에 오히려 범죄자들이 침투하고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는데, 시야를 가리던 장벽이 없어지고 나니 집주인과 길거리 행인 모두가 자연스럽게 범죄의 상호 감시자가 됐다. 미국의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가 말한 ‘거리의 눈’ 이론이 현실화된 것이다.
하지만, 담장이라고 없애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잘만 쓰면 돈이 되기도 한다. 지중해의 보석 같은 섬, 산토리니는 연남동 끄트머리의 공동체적 사고가 도시 전체로 확장한 경우인데, 오히려 담을 경관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사례다. 높이를 낮추고, 섬 전체가 협심해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이행함으로써 산토리니의 골목길은 걷는 자체만으로도 행복감을 주는 장소가 되었다. 하얗게 빛나는 둥글둥글한 담벼락은 당나귀뿐만 아니라, 컬러를 가진 모든 존재의 멋진 배경이 된다.
원래 산토리니 건축의 재료는 누르스름한 화산재이고, 건축물의 외관 색도 다들 가지각색이었지만, 흰색으로 통일한 후 행동에 옮긴 결정이 그저 그런 곳으로 남을 수 있었던 외딴 섬을 세계 최고의 휴양지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산토리니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마도 나의 지붕이 윗집의 마당이 된다는 강한 상호의존적 공간 구조, 즉 고만고만한 집들이 얼기설기 엮여서 살아왔던 수평적 관계망이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와 반대로, 사회적 양극화가 극단화된 사회로 갈수록, 담은 위압의 징표가 된다. 중남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극한의 가난을 엿볼 수 있는 허름한 판잣집 사이로 부자들의 높은 담이 보이곤 한다. 물론 우리 도시도 그랬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세계적으로 금융 소득의 편차가 확대되면서 벌어지는 부자와 빈곤층의 격차가 악화되면서 선진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한 건축가는 조만간 미국 인구의 절반이 빈민화되면서 중남미에서나 볼 수 있었던 도시 형태가 출현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즉, 화적떼를 막기 위한 집의 요새화가 진행될 수 있다는 뜻이다. 높은 담장 위로 보안 카메라가 설치되고, 전기, 수도는 물론 식량까지도 담 안에서 자급해야 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양식이 등장할 수 있다. 전혀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92년도 LA 폭동을 기억한다. 내 손에 총을 들고, 담장을 의지해 가족과 재산을 지켜야 할지도 모르는 세상이 언제고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조경가 군터 보크트와 아티스트 댄 그래이엄이 재현한 생울타리 정원 작품. 최이규 제공
그래서 담의 형태는 그 문명의 상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치안과 사회적 안전망이 정착한 사회, 예를 들어 캐나다 밴쿠버에서는 수벽이라고 불리는 생울타리 담을 흔히 볼 수 있다. 때로는 허리 높이로, 때로는 웬만한 단층 건물보다도 높게 길을 따라 이어지는 녹색 담은 안전하고 풍요로우며 공동체가 살아있는 도시의 상징이다. 영어에서 헤지(hedge)라고 불리는 생울타리는 원래 가축이나 야생동물이 텃밭 정원을 헤집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나지막하게 기른 헤지는 빨래는 널어 말리는 건조대 역할도 겸했을 정도로 생활에 밀착되어 있었다. 줄기에 가시가 돋은 산사나무류를 주로 썼고, 파리의 튈르리나 베르사유에서 볼 수 있는 대규모 헤지는 온대지방의 대표 수종인 서어나무를 흔하게 사용했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잘 살려서 주택가에서도 잘 가꾼 생울타리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돌이나 콘크리트 담보다 훨씬 싸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부동산 가치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스위스 조경디자이너 군터 보그트가 생울타리를 모던하게 해석한 작품은 유럽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인데, 실은 우리 조상들이 그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멋진 생울타리를 갖고 있었다. 한자로 취병이라고 썼는데, 비췻빛 병풍이란 예쁜 뜻이다. 곧은 나뭇가지로 격자 혹은 아치형 프레임을 만든 취병은 요즘 보아도 너무 세련되다.
담과 바닥의 소재감이 통일되어 세련된 맛을 주는 담장. 이한송 제공
내가 어릴 때 자란 집에는 탱자나무가 담을 이루고 있었다. 울타리에서는 참새 같은 소형 조류의 짹짹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포식자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징검다리 쉼터가 되기 때문이다. 고양이나 강아지들은 아래쪽 성긴 개구멍을 통해 들락날락했다. 생울타리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러한 선택적 투과성이다. 바깥쪽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이고, 햇빛과 바람도 완전히 가리지 않아서 탱자나무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안온한 평화로움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부수적으로 목재와 열매를 제공하기도 한다. 할아버지가 탱자나무 가지를 잘라 오줌통 속에 몇 년을 묵힌 후 말려 장기알을 만들었고, 가시는 고동이나 소라를 먹을 때 포크로 쓰이기도 했다. 정원과 텃밭을 가꾸는 데 열중했던 할아버지에게 탱자나무 울은 경계를 만드는 담이 아니라, 공간을 만드는 담이었다.
담은 외부 공간에서 가장 큰 수직적 요소이기 때문에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담이 정의하고 있는 공간의 성격이 크게 좌우된다. 그 유명한 교토 료안지의 젠가든일지라도, 자갈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흙담의 와비사비(간소하고 소박한 정취)한 맛이 없다면, 생선 빠진 스시처럼 멍청한 공간이 될 것이다. 요즘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란한 녹색의 펜스나 과도한 무늬살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반어적인 표현이지만, 훌륭한 담일수록 투명해진다. 있어도 없는 듯이 공간과 일체화될 때 가장 빛난다. 바닥과 심지어 앞에 식재된 대나무까지 통틀어 일체된 느낌으로 설계된 조경디자이너 이한송씨의 담은 최근에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이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