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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버티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기

등록 2020-12-10 07:59수정 2020-12-10 10:45

전주의 콩나물국밥. <한겨레> 자료 사진
전주의 콩나물국밥. <한겨레> 자료 사진
몇 주 전, 첫 책 출간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갔다는 뉴스를 접했다. 징글징글한 코로나, 언제쯤 끝이 날까.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상황들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당분간 우리 일상은 더 힘들어지겠지. 얼마 전까지도 종종 카페에서 글을 썼기 때문일까.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 무언가에 열심히 몰두하던 ‘카공족’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가려나, 흐트러지지 않고 다시 생활 리듬을 잘 찾았으면. 알지도 못하는 막연한 얼굴들이 걱정됐다.

그러면서 ‘왜 하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시대’라는 거대한 이야기가 삶으로 속속 들어오면서 각자의 계획을 세세하게 무력화시켰다. 여파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로서는 언젠가 출간을 하게 된다면 ‘꼭 해야지’ 하고 고대했던 북 토크를 당분간 꿈도 못 꿀 것이다. 출판사는 어쩌지. 이렇게 삶이 팍팍한 시기에 책을 얼마나 구매해 읽을까, 걱정이 앞서며 미안했다. 나는 왜 하필 올해, 지금 책을 내기로 한 걸까 싶기도 했다. 그래, 왜 하필 올해였을까. 수능을 준비하던 수험생들에게도,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구직자들에게도, 개봉을 앞두었던 영화 관계자들에게도, 결혼을 앞두었던 예비부부에게도, 사업 확장을 꿈꾸었던 사장님들에게도, 올해는 가혹했다. 꿈이 좌절되는 듯했고, 생계에 관해선 더욱 숙연하고 서글퍼졌다. 누군가는 비행을 멈췄고, 누군가는 유니폼을 벗었고, 누군가는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열심히 준비한 영화는 텅 빈 객석에서 몇 차례 상영되지 못한 채 아이피티브이로 옮겨졌다. 그렇게 버틴 시기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가는 것이다.

얼마 전, 방송 촬영 때문에 전주에 갔다. 예년 같으면 북적북적할 한옥마을은 무척 한산했다. 사람들에게 치이는 관광지는 불편하지만, 텅 비고 한산한 관광지는 더욱 쓸쓸해 보였다. 코로나가 바꾼 풍경이었다. 예전 같으면 한참 줄을 서야 했을 콩나물 국밥집도 손님이 드문드문했다. 조용히 콩나물국밥을 먹는데 누군가 “깍두기랑 김치 맛이 좀 어때요?” 물었다. 그러잖아도 김치가 유난히 맛있다 싶었기에 “진짜 맛있네요”라고 하자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사장님인 듯했다. “요즘 손님이 많이 줄었지요?”라고 묻자 사장님은 아예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아 답했다. “말도 못 해요. 매출이 반토막이에요. 그런데 우리만 힘든 게 아니니까. 김치 한 번 더 리필해 줄까요?” 이미 배가 불렀지만, 그가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워낙 흐뭇하게 봐서 더 충실하게 먹었다. “배 금방 꺼지니까 든든하게 먹어요.” 그 말을 듣는데 배 속이 뜨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깍두기 맛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사장님의 말이었다. 친절함, 다정함. 넋두리라도 나누면서 서로의 안녕을 챙기는 것, 그러면서 서로 한 줌의 힘을 나누는 것. 그게 필요한 때구나.

말끔하게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잠시 휴대전화를 열었다. 에스엔에스(SNS) 피드를 쓱 올리니 제주도 스냅사진이 보였다. 지난해까지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사진작가 지인이 촬영한 사진이었다. 그는 작품 활동과 병행해 여행객 사진을 찍어 생계를 유지했는데, 코로나19로 끊기자 몇 달 전 모든 계획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막막해하던 것도 잠시, 이전처럼 손님들을 성실히 모집하면서 어느새 꽤 자리를 잡은 듯했다. 그러면서 내게 코로나가 끝나더라도 제주도에서 계속 사진 촬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도의 풍경이 꽤 마음에 든다면서. 또 다른 지인들은 온라인 상품을 개발하거나 서비스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원해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바뀐 환경에서 새 영역을 개척하며 비대면 부분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로 삼는 모습이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마스크를 쓰고 식당 손님들에게 자리를 안내하는 주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래, 완전히 멈추지만 않는다면 계속해나갈 수 있는 거구나.’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일단 매일 버티면서 계속 나아가보는 것이다. 모든 계획이 어긋나버렸지만 잠시 다른 모습으로 머물고 있을 뿐이라고 믿으며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사장님 말대로 국밥을 배불리 먹길 잘했다. 국밥의 힘으로, 이렇게 지치지 않고, 칼럼을 쓰고 있으니까. 지치는 순간이 오면 떠올릴 것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무너지지 않고 성실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모두 박수를 받을 만하다.

임현주(MBC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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