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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모든 관계에서 합격점 받겠다는 마음 버려라”

등록 2020-11-27 07:59수정 2020-11-27 22:18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몇 시간 전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 걸 확인했지만, 바쁜 하루를 보낸 탓에 퇴근길에서야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A의 장난기 어린 말투는 여전했다. 강변북로는 빨간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꽉 찰 만큼 교통체증이 심했으나, A와의 통화는 그런 피로감도 잊게 할 만큼 반가웠다. A가 용건이 있어서 전화를 건 것은 아니었다. 그냥 문득, 한 번씩 안부를 묻고 싶은 사이가 있지 않은가.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오랜만에 통화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 A와는 그런 관계다. 10여년 전 한 직장에서 동갑내기 선·후배로 만난 우리는, 당사자가 완전히 잊은 ‘흑역사’도 “너 그거 기억나?” 하며 낄낄대고 나눌 수 있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A가 말했다. “나 잠시 쉬게 됐어.” 마음이 쿵 하는 말이다. “어디 아파? 심각한 건 아니지?” A는 직장 상사와 몇 년간 힘든 관계를 지속하다가 얼마 전 정신과를 찾았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사의 집요한 괴롭힘 때문이었다. 나는 더 묻지 않고 잘했다고 말했다. A는 정말 쉬어도 되는 건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걸까 싶어서, 상사의 괴롭힘이 더 심해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그가 결코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결정에 좀 더 객관적인 확신을 얻고 싶을 때가 있다. A는 아마 그런 지지가 필요해서 전화를 건 게 아니었을까. A만 겪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힘주어 이야기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다 필요 없고, 너부터 챙겨. 버티고 버티다가 무너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게다가 그 상사가 누가 봐도 이상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 않을 거야. 혹여 원망 좀 들으면 어때. 네가 1순위야.”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직장에서 싫은 소리 듣는 걸 딱 싫어했기에, 나는 뭐든 욕먹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정작 내 마음, 컨디션, 상처는 후순위로 미뤄두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 있었다. 그날 이후, 모든 관계에서 합격점을 받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대신 나와, 나에게 정말 중요하고 가까운 사람을 더 잘 챙기겠다고 생각했다. 함께하는 게 너무 힘든 관계는 참고 견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 했다. A의 결정은 그래서 응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왜 피해자가 피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이도 있겠지만, 피해자에게 힘을 쥐어짜 내 싸우라고 하는 것도 늘 좋은 방법인 것은 아니다. 먼저 바닥난 에너지를 단단하게 충전하고, 다시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되는 것이니까.

전화를 끊고 나니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A처럼 천진한 사람들이 오히려 관계에서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고 ‘세상과 거리 두기’를 하곤 한다. 몇 년 전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누군가의 괴롭힘으로 생긴 상처는 직장에서뿐 아니라 일상으로, 인생 전체로 먹물처럼 무섭게 스며들어왔다. 나는 잘 웃지 않게 되었다. 몇 달 만에 만난 지인들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이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은 또 다른 상처가 됐다. 이전 같지 않아서 더는 나를 좋아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그런 말을 건네기보다는 내 상처를 들여다봐 준 사람들이 고마웠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들쑤셔 묻지 않고 괜찮다고, 그럴 때가 있는 거라고, 기다리겠다고 담담하게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그때의 경험이 아픈 시간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씨앗이 되었다.

동갑내기 친구인 B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이따금 내게 힘들다는 뉘앙스를 건넸고 나는 그때마다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대신 병원은 예약했는지, 약은 잘 챙겨 먹는지, 컨디션은 어떤지 등을 물었다. B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좋아. 더 묻지 않고,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않아서. 친구들은 내가 힘들어하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줘. 고맙긴 한데 사실 그게 더 힘들어.” 잘 챙겨주지 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B의 그 말이 나는 오히려 더 고마웠다. B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있는 듯 없는 듯 계속 네 곁을 지키겠다.” 대신 필요할 땐 언제든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 그럴 땐 꼭 말해달라고.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말을 건네고 싶다. “나부터 챙기자고, 나부터 살고 보자고. 의무감, 책임감, 완벽함에 대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에너지를 채우고 오자고.”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묵묵히 다정하게 기다려주는 것뿐이다. 한껏 심각해질 필요도, 의사가 되어 진단을 내릴 필요도 없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니까.

임현주(MBC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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