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이게 다 그놈의 망할 드라마들이 문제입니다.
대학에 입학하면 낭만과 로맨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랑 고백과 기습 키스, 아찔한 삼각관계, 삶이 이런 것들로 넘쳐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학 첫 미팅에서 막걸리를 세숫대야에 부은 뒤 양말을 벗어 빨아 마시는 일군의 ‘막장’ 복학생들을 만난 트라우마를, 대학생활 4년은 끝내 위로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화려한 불륜의 세계가 있을 줄 기대했습니다. 능력 있는 옆집 유부남 혹은 새끈한 거래처 남자 아니면 솜털이 뽀송뽀송한 앳된 후배 때문에, 가족을 택할 것인가 사랑을 택할 것인가 고민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라도 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옆집 남자는 배불뚝이 대머리 아저씨요, 거래처는 전부 골드미스요, 신입사원은 나이 제한이 없어진 탓에 입사한 뒤 5년차가 되도록 선배뻘 남자들이 후배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저 말고도 드라마 때문에 대학생활을 망친 사람이 또 있더군요. 수업 땡땡이는 기본, 가끔은 시험조차 땡땡이를 치며 모든 과목에서 꼴찌를 도맡으며 결국 2.0을 가까스로 넘는 수준에서 대학생활을 마무리하게 됐다는 그 사람. 바로 남성 패션잡지 <에스콰이어>의 패션에디터 심정희씨입니다.
텔레비전과 잡지 등 각종 매체에서 날카로운 패션 비평으로 이름이 난 심씨는 최근 펴낸 그의 책 <스타일 나라의 앨리스> 서두에서 “내가 그토록 학과 공부를 게을리했던 건 실망감 때문이었다. 난 대학교에 가면 <우리들의 천국>이나 <내일은 사랑>류의 드라마에서 본 대학생활이 눈앞에 펼쳐질 줄 알았다. 수험공부하느라 찐 살들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쫘악 빠지고, 얼굴도 몰라보게 예뻐져서 이병헌처럼 멋진 남자들이 데이트하자고 졸라대고, 강의가 비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이 책은 신입생 시절 무참히 깨진 환상으로 학점뿐 아니라 자기관리까지 포기하며 교복과도 같은 몇벌의 옷으로 사계절을 버티던 패션 방관자가 ‘소 뒷걸음질에 쥐 잡히는 형국’으로 패션잡지계에 입문한 뒤 ‘미운 오리 새끼’처럼 패션잡지와의 어색한 동거 끝에 스타일 제국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드라마 <스타일>보다 더 흥미진진한 그의 육성을 7면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김아리 팀장 ari@hani.co.kr
김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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