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esc를 누르며
그 사건의 실체는 이러했습니다. 2000년 8월 당시 서세원씨가 진행하던 ‘야!한밤에’라는 인기 토크쇼 녹화 현장. 개그맨 김한석이 농담처럼 물었습니다. “홍석천씨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하신다는데 그게 맞습니까?” 이에 홍석천은 진지하게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사실 남자를 좋아하고 현재 3년간 동거하고 있는 애인이 있습니다.” 촬영장 분위기는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고 웃자고 질문을 던진 김한석도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물론 홍석천도 충분히 농담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기회가 오면 내 성정체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을 먹고 있던 홍석천으로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순간이었습니다.
녹화는 중단됐습니다. 제작진은 회의 끝에 홍석천 개인을 위해 편집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제작진과 코디·매니저들을 통해 소문은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고 결국 한 스포츠신문에서 헤드라인으로 ‘나는 호모다!’라고 1면에 대문짝만하게 내보내게 됐습니다.
홍석천을 만난 것은 당시 이 신문 기사로 인해 그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줄줄이 잘리면서 동성애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꾸려진 ‘홍석천 커밍아웃 대책위원회’에서였습니다. 서울 동대문의 허름한 인권단체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울분에 차 있거나 흥분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여러 가지 말을 했고, 그중에서 10년이 지나도록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는 이 한가지입니다. “제가 커밍아웃하고 나서 우리집 대문에 여러 가지 낙서가 많이 생겼어요. 온갖 욕설들. 그런데 어느 날은 제가 문을 열고 나갔는데 초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낙서를 하다가 도망을 가는 거예요. ‘호모 새끼’라는 욕설을 남기고요. 아이들을 불러 세웠어요. ‘너 호모가 무슨 말인지 아는 거니?’ 아이들은 그 뜻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도 나 때문에 ‘호모’라는 말을 뜻도 모르면서 증오에 차서 욕설로 쓰고 있는 현실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왜 이 어린아이들마저도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 건지….”
홍석천이 10년 전 대책위에서 했던 이 말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때 저를 만난 걸 기억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홍석천을 10년 만에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요식업계의 큰손’으로 만났습니다. 그 결과는 4면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김아리 〈esc〉팀장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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